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achroid Mar 14. 2024

거울 속 빌런

그래도 예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침에 욕실 거울로 얼굴을 비춰 볼 때마다 망연해진다. 나날이 못생겨지는 얼굴. '못생긴 건 좀 괜찮냐'는 우스갯소리가 절로 떠오른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잘나가는 사람들은 늙어서도 얼굴에서 빛이 난다던데, 내 얼굴에는 짙은 낡음이 컴컴하게 드리워져 있으니까. 특히 더 못생겨진 건 눈이다. 진한 쌍꺼풀이 있는 유행이 지난 눈. 늙고 탁해진 눈. 통음난무의 밤은 물론 고독한 혼술의 밤이 지나면 못생김은 더 심각해진다. 이렇게 못생겼는데 마스크는 대체 어찌 벗는단 말인가 싶어 엔데믹이 왔지만 아침마다 살뜰하게 챙긴다. 메타버스 시대가 와서 내 얼굴은 나만 보는 날을 기다렸건만, 저커버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메타버스는 미국에서조차 사망선고를 받았단다. 뒤통수 한 곳이 심하게 아프고 약한 뇌진탕 기운까지 있어서 그런지 얼굴은 더 목불인견이었다. 몇 달 만의 회식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가뜩이나 뒤집힌 속에 더해 뇌진탕 어지럼증까지 겹쳤지만 그보다는 이제부터 어젯밤 일로 당할 놀림과 망신 때문에 더 정신이 아득해졌다.


Y는 회식에서 불쑥 'OOO 피해자 모임'의 존재를 아느냐고 물었다. 저 진짜 웃겨 죽는 줄 알았잖아요. 한 4~5명 된다던데요? OOO는 당연히 내 이름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걔들이 대체 나로부터 무슨 피해를 봤다는 걸까? 그야 모르죠. 직장상사라는 게 원래 자기도 모르게 부하직원 괴롭히는 거 아닌가요? 그 모임의 멤버들은 지난 10여 년에 걸쳐 모두 내 부하직원이었던 인물들이었다. S가 오랜만의 회식이라며 쭈꾸미집에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조니워커 블루를 가지고 오는 바람에 자제력을 상실한 나는 결국 그 녀석들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는 데도 애를 먹어야 했다. 가장 충격인 건 그 인간들 중에 내 고과를 희생하고 대신 최고점을 줄 정도로 애지중지했던 E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E가 입사한 후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 진짜 이런 말 처음 해보는데, 간만에 복덩이가 들어왔구나. 너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손이 빠르고 매사에 주저함이 없으며 외모도 번듯했던 그 직원은 휴직을 하면서는 업무 핑계를 댔고 마침내 퇴사를 하고서는 주저없이 내 욕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나는 앉은 채로 비틀거리면서도 나머지 인간들의 이름과 얼굴이 한 줄 평과 함께 떠올라 울화통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맙소사, 피해자 모임이라니.


사람이 늙어도 가장 변함없는 부분은 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늘 귀가 제일 잘 생겼다고 스스로를 위로해왔다. 적당한 크기와 각도, 분명한 귓바퀴와 두툼한 귓불까지. 이 정도 귀면 연예인 부럽지 않다고 믿었다. 의외로 멋진 용모의 사람들도 이상한 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나는 귀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생을 견딜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MBTI 조차 타노스의 그것이라는 INTJ라는데, 모든 면이 다 구리다는 건 인간적으로 진짜 너무한 거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귓불도 나이가 들수록 더 길어진다는 뉴스를 봤다. 거울로 귓불의 길이를 살펴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제는 귓불의 길이가 아니었다. 양쪽 귓불 모두에 선명하게 패인 대각선 주름. 의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바로 그 치매 주름 때문이었다.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알코올성 치매가 홀연히 찾아온 노안처럼 갑자기 불쑥 앞을 막아서는 느낌이었다. 결국 이거였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무시로 아득한 옛 기억만 떠올라 항히스타민제를 먹은 봄날 오후 같이 나른해지는 이유가.


- H: 얼굴만큼 마음이 못생겼고 일도 못하는 주제에 얼토당토않은 오피스 정치를 하고 다녀서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던 인간.

- S: 성격이 온순하고 책임감도 있었지만 숫자 정리를 도무지 못해서 나가기 직전에 크게 야단을 맞고 사라진 이후 소식이 끊겼던 인간.

- R: 일을 하러 나오는 건지 쉬러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점심시간마다 책상에 엎어져 자고 저녁이면 헬스를 하고 춤을 추러 다닌다던 녀석.


또 누가 있을까. 내가 세상을 살면서 피해자를 만든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더 있을까. 누구를 괴롭힌다는 건 고데기 열체크를 하거나 막말을 퍼붓는 정도는 돼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험한 길은 돌아가고 강한 자는 피해 가자는 소신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는데, 나는 어느새 누군가에게 빌런이 되어 살고 있었다. 오 주님. 저는 제가 죄인인지도 몰랐군요. 퇴사하면서부터 인사팀에 내가 협력업체들로부터 돈을 먹고 있는 것 같다는 황당한 음해를 했던 H야 원래 악질인 줄 알았지만, 내 뒤통수를 더 시원하게 걷어차고 마음을 다치게 한 진정한 빌런은 E였다. 내 고과를 포기하는 대신 최고 고과를 줘서라도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던 E를 붙들어둬야 한다고 생각한 바람에 다음 해 몇 년 만의 일괄 연봉 인상에서 나만 제외가 됐다. 그래도 한 번 다시 생각해봐라. 그렇게 마지막까지 나가겠다는 직원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것도 처음이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예전에 만났던 한 야심가는 말했다. 저는 이제 확실히 깨달았어요. 아랫사람에겐 절대로 잘 해줄 필요가 없어요.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정말 발바닥에 붙은 걸까? 면접 후 평가에서 E에 대해서 시큰둥하던 다른 사람들에게 왜 E가 괜찮은지 열변을 토했던 것도 나였다. 매일 30분씩 지각을 해도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내가 일정이 있어 일찍 나갈 때는 함께 나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건만. 은혜는 역시 원수로 갚아야 제맛인 걸까? 마음은 통하지 않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었다. 술자리 내내 그룹 전체의 끝판왕 빌런이 나타났다며 K의 놀라운 행태를 욕하던 나는 'OOO 피해자 모임' 때문에 돌연 하이킥 KO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술집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고 숙취가 없어지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숙취가 깨는 내내 공황장애급 우울감이 몰려왔다.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로 술에 취하고, 하급자들에게 빌런이 되어 살아온 인생인데 아침마다 얼굴은 더 못생겨지고 있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자들과의 시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니.


귓불 주름 논문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귓불은 움직이지 않는 신체 부위이므로 잔주름이라면 몰라도 노화로 인한 굵은 주름은 결코 생길 수 없다. 그런데 그곳에 깊이 팬 주름이 나타났다는 건 귀 부위를 지나는 혈류의 문제를 시사하고, 이는 뇌로 공급되는 어떤 흐름에 심각한 장애가 있다는 것. 똑바로 누워 자서 뒤통수가 납작하고, 업고 다녀서 다리가 휘었다는 식의 민담과 달리 이건 미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혹시 맨날 옆으로 누워 자면서 밤새 귓불이 접혔던 건 아닐까? 하지만 치매 주름은 인터넷 가짜 뉴스가 아니라 진짜 의학 논문이었다. 온갖 고유명사들이 뇌에서 사라지고,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방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호칭을 부르지 않기 위해 머리를 짜내야 했던 건 그냥 자연스러운 뇌의 노화가 아니었나? 나는 어쩌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걸까? 뒤통수는 괜찮은 걸까? 나는 누구인가? INTJ에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이었나? 오늘도 아침 욕실 거울에는 못생긴 데다가 치매가 와서 급기야 자신을 망각한 낯선 늙은이가 아직도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막연한 날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