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위기는 도둑고양이처럼 찾아온다. 이상하리만큼 포근했던 11월 어느 오후에, 나는 번다한 문제는 모두 J에게 떠넘기고 심사가 사나울 연말연시를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전문가시잖아요. 저는 그냥 한 2주, 아무 생각 없이 방콕의 낯선 골목을 걸으며 향후 거취나 고민해 볼까 합니다. J의 반응이 영 흐리멍덩하긴 했지만 그는 어쨌든 전문가였고, 그게 생계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내가 아닌 J였다. 의심스러운 시간이 지나며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나는 이국에서의 고적한 망중한을 떠올리며 내가 왜 그토록 연말을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람들은 겨울이 오면 뭐든 결론을 내려고 한다. 한 해의 성적을 매기고, 실적을 평가하고, 나이를 먹는다. 크리스마스와 카운트다운 같은 북새통에 과몰입하는 이유도 겨울과 연말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겨울은 늙을수록 더 혹독해진다. 백석의 시구처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기운이 사위를 온통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노년의 겨울. 그렇게 춥고 수상한 고요의 시간이 살금살금 지나가는 동안에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복리 이자처럼 꼬이고 있었다. 12월 중순, 마침내 미신 같았던 도둑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문제는 더 이상 고양이가 아닌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돼 있었다. 밤마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11월이 되는 꿈을 꾸거나, 거짓말처럼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는 허무맹랑한 백일몽에 시달렸다. 이대로 문제가 터진다면 가난하고 외롭고 낮고 쓸쓸한 시간조차 감사해야 할 팔자가 틀림없었다.
12월 29일 꼭두새벽에도 인천공항 제2터미널은 북새통이었다. 2주나 차를 공항 발레에 맡기는 게 영 찜찜했지만 그까짓 십몇 만 원쯤 주차비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이미 오래전에 멘탈이 나갔기 때문이었던 거 같다. 모든 게 다 끝장날 수도 있는데, 그깟 주차비가 무슨 대수랴. 나는 점점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는 기분이었다. 늙는다는 건 무감해지거나 무기력해진다는 것과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남의 시선과 평가가 중요하다. SNS가 그토록 미어터지는 이유도 나를 정의하고 평가하는 가장 손쉬운 기준이 바로 남이기 때문이다. 영하 20도의 밤에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줍는 노인들의 피곤하지만 완강한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의 젊은 시절을 상상한다. 그들이 이성의 시선을 의식하고 체면을 차리던 시절을. 그리고 마침내 춥고 컴컴한 인생의 겨울이 이렇게 홀연히 찾아와 지난 모든 환한 시절을 집어삼키는 공포를. 비극의 농도가 다를 뿐, 노년은 죽음보다 길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고통을 감지하지 못한다. 눈을 감고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보려고 할 때마다 요상하게 보험회사 광고에 등장한 노인 모델들의 하얀 머리칼과 행복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도 그런 이유다. 낯설어진 인천공항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용재 오닐의 [Winter Journey]를 들었다. 희미한 새벽 풍광 때문에 한 십 년 전쯤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낯선 도시의 간질간질한 객창감이 갑자기 떠오르는 바람에, 그리고 [Winter Journey] 때문에, 이대로 비행기만 타면 모든 문제로부터 홀연히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한항공 카운터에는 등산복 차림의 50~60대와 골프복 차림의 40~50대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늙으면 저렇게 팔자 좋은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마치 출국금지가 내려지기 직전 해외로 도주하는 범죄자 같은 심정이었다.
T는 코로나 때문에 공항버스 노선들이 대거 사라져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전날 미리 와서 밤을 새워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꼭두새벽의 공항 라운지에서 T는 잔칫상이라도 차릴 기세로 음식들을 가져와 늘어놓더니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역시 음식은 마티나 라운지가 맞나 보네요. 그래도 갑이랍시고 괜히 비즈니스석 타령을 했다는 후회 때문에 나는 약간 안절부절이었다. 어쩌면 실패한 야반도주가 될 수도 있는 여행이네요. 2주는커녕 며칠 만에 짐을 싸서 돌아오게 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나는 입맛을 잃고 커피만 들이켰다. 그럼 간밤에 잠을 거의 못 주무셨겠네요? T가 동서양을 횡단하는 메뉴들을 한꺼번에 쓸어 넣는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9시에 자서 5시에 일어났죠. 자신의 육체를 저렇게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니. 그는 나에게 연신 음식을 권했다. 그래도 좀 드십시오. 명색이 여행사 직원인데 한동안 공항 근처에도 올 일이 없다가 안 죽고 살아 있으니 이렇게 다시 비행기도 타고 라운지에서 아침밥도 먹는 거 아닌가 싶어요. H 여행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여행사였고 그랬기 때문에 수많은 직원을 해고하거나 무급휴직으로 전환했어야만 했다. 그럼 그렇게 오랫동안 무급휴직이었던 직원들은 어떻게 버텼나요? T가 담담하게 정리한 스토리는 2년이 넘었을 고통에 비해 너무 날씬한 문장들이었다.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거나 배달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죠. 회사가 정부로부터 지원금이라도 받고 나중에 복직을 하려면 정식으로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것도 안 됐거든요. 풀필먼트 센터라는 직수입 용어의 매끈함과 달리 쿠팡 물류센터는 멀쩡한 사람들의 허리를 절단 내는 지옥이라던데. 그나마 배달이 짭짤했겠네요. T는 음식을 삼키며 맹숭맹숭하게 말했다. 그런데 저는 배달은 엄두가 안 나서 못하겠더라고요. 그냥저냥 다른 알바를 했습니다. 편의점에서도 일하고 수영장에서도 일했죠. 태도는 쉽게 전염된다더니. T의 물색없는 낙관 때문인지, 공항 라운지의 기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나는 이대로 시간이 정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련은 늘 예상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J가 꽁무니를 빼고 난 후 나는 간신히 소개받은 M에게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매달렸다. 이게 만약 결국 수포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회사도 회사지만 왠지 저도 미리 개인 변호사를 물색해놔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J는 그렇게 천하태평이었던 걸까요? 내가 울상이 되어 버둥거릴 때에도 M은 달콤한 장담을 하지 않았다. 돼야죠. 이렇게 된 이상 저희도 노빠꾸입니다. 매가리 없는 장담보다 어쩌면 그런 비장한 다짐이 더 위안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도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투입해서 최대한 애를 쓰고 있었지만 혼돈의 카오스인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랬던 M이 수술 때문에 자리를 비운다고 통보했을 때 나는 주말 드라마급 우연의 연속에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저 대신 저희 부서장님과 다른 팀원들이 함께 끝까지 도와드릴 겁니다. 초여름 날씨의 수완나폼 공항에서 밀린 담배를 연신 피우는 동안에도 나는 T에게 이 모든 게 마치 꿈같다고 중얼거렸다. 날씨는 진짜 미쳤네요. 천국이 있다면 이런 날씨일까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사달이 날까요? 스마트폰을 켜자 한꺼번에 개설된 여러 개의 단톡방에서 쉴 새 없이 메시지들이 올라왔다. T가 희미한 경북 액센트로 말했다. 뭐, 된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죠. 어차피 이제 답을 기다리는 것 외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요. 원효대사의 해골물 같은 일갈. 한국에서는 다른 문제들까지 겹쳐 마구잡이로 전화가 왔다. 로밍 중인 고객에게... 이런 안내 멘트도 안 나오는 건가? T 로밍이면 무료라서 이런 건가? 사람들은 방콕이니 간단히 이야기하자는 내 대답에 부럽다는 말로 응수할 뿐 인정사정없었다.
인생은 어쨌거나 시간의 흐름이고, 인생이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 바깥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회사의 오너인 H와, 머슴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화려한 파티에서 내가 사 나른 수십만 원짜리 와인을 마시면서 꿈같았던 지난 한 달이 마침내 끝났다는 생각에 울컥해졌다. 덕분에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내다 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H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270도 뷰를 자랑하는 프레지덴셜 스위트의 창밖으로 거짓말 같은 방콕의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약간 눈물이 날 거 같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게 얼마나 기이한 광경일지 생각하면서 간신히 웃어 보였다. 재벌도, 연예인들도 술을 마시면서 재벌 이야기와 연예인 뒷담화를 하며 놀았다. 나는 대화에 끼지 못한 채 연신 고개만 주억거리며 2주 전 인천공항 라운지와, 멀리 짜오프라야 강에서 터지던 신년 카운트다운 불꽃놀이 폭죽을 멍하니 바라보던 밤과, 통로의 코리아타운에서 마셨던 리젠시 브랜디의 달달한 맛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올해 특히 마음고생도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드라마 속 재벌과는 딴판인 매너 좋은 H의 질문에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벌써 10년도 넘었죠. 머슴질도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할만하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절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일이란 게 다 고생이죠 뭐. 나는 난생처음 마셔보는 것 같은 환상적인 맛의 와인을 꿀떡꿀떡 삼켰다. 다들 그렇게 스펙터클하게 인생을 즐기는 동안 저는 그냥 이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건가 싶네요. 2주 동안 평균 4시간을 잤는데 비싼 와인이라서 그런 걸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옆자리로 온 S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일이 막 진행될 때는 힘도 들지만 그래도 그 맛에 산다는 생각도 드시죠? 안 바쁘실 때는 무슨 재미로 사세요? 글쎄요. 그냥 제 자신을 견디며 삽니다. S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벌써 2023년. 어느새 머슴질 하기엔 너무 늙어버렸다는 생각에 나도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