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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쟌카 Apr 09. 2020

[꿈은 늙지 않는다] 한 세기 전의 서울은

29년생 서울토박이 할머니의 글들

이제는 아버지가 요주의 인물이 되어 골목 건너 '서울 여관'에 일본인 형사가 상주하며 우리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문소리에도 우리집을 향한 창문을 살짝 열고 염탐하면, 나는 확 돌아보며 한참을 지지 않고 노려보며 눈싸움을 했다.


1929년 9월 초가을에 나는 옛 동대문부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산실에서 태어났다. 어스름 새벽의 고요를 깨고 힘차게 울어대서 어머님은 분명 남아일 것이라고 생각하셨단다. 아버님은 신문사 일로 바쁘다고 사흘 후에 병원에 들르셨다고 한다. 나는 자라면서 늘 섭섭한 마음이 있었던지 그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어리광을 부렸다. 위로 오빠가 있었거만 워낙 남아선호가 심했던 시절이라 내가 사내아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해 집안 내에서 네 명의 여아가 내리 태어났으니, 시골에 계신 할아버님도 '쯧쯧.' 혀를 차시며 마땅치 않아 하셨단다.


서울 한복판인 '종로구 서린동 173번지'가 나의 본적지이다. 지금의 동아일보사 신문박물관 뒤 골목에 우리 집이 있고 담을 휘어 돌아가면 골목 안의 막다른 집에 아버님과 동아일보에 같이 출근하시던 '명정 40년(酩酊 40年)'을 쓰신 영문학자 변영로님이 살고 계셨다.


'농민은 농사를 지어야지.' 라시는 할아버님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혀 아버님은 충청도 산골에서 소학교 졸업반 일본인 담임선생님의 소개장만 달랑 들고 고향을 뜨실 수밖에 없었다. 12세 어린 소년은 이른 봄 괴나리봇짐을 허리에 차고 아흔아홉 고개를 걸어서 청운의 꿈을 안고 천안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그때 처음으로 낯선 서울의 제인고보에서 수학한 것이 일생에서 제일 힘든 때였다고 회고하셨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기자 생활을 하던 중 어머니의 담임선생님의 중매로 결혼하셨다. 어머님은 파고다공원 길 건너편에 이진사댁 따님으로 곱게 자라 사범 부속소학교를 거쳐 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후쿠사와 유키치는 정한론을 부르짖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집집마다 글을 읽고 있는 조선을 배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후기 통신사를 예우하던 일본인은 한국문화에 매료되었고 백제인이 만든 것이 아니면 물건다운 물건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열등감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데 주력하였다. 메이지 시대 후 우리의 식민지시대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근대 서양인들이 일본은 '무사의 나라', 조선은 '학자의 나라'로 즉 일본은 칼의 나라, 조선은 붓의 나라로 표현하였다.


일제 강제병합 이후 경복궁의 수난은 본격화 되었다. 1926년에 왕궁 건물 200여 간을 헐어 일(日)자 모양의 조선총독부를 10년 공사 끝에 들어앉혔다. 그리하여 정치 일번지인 조선 정공인 근정전을 가려버린 것이다.


광화문도 앞을 가린다는 이유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옮겨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광화문은 왕실의 정문이며 상징이었고 특히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다.


어린 시절에 본 일제시대 정치 일번지인 광화문통은 한적한 시골 마을같이 겉으론 평온했다. 골목을 돌아나오면 왼쪽은 지금의 청계천 광장이고 다리 밑으로는 틈틈이 제멋대로 박힌 크고 작은 돌을 끼고 개천물이 여울져 휘어가는 물줄기 따라 졸졸 흐르고 있었다. 요즘같이 햇빛이 쨍하고 따가운 여름날에는 삼삼오오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방망이 소리 요란하게 장단 맞추고 있었다.


그 당시 서울의 인구는 20만, 그중 80%가 문맹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중문에 던져진 신문을 들고 사랑방의 아버님의 따끈한 이부자리에 들어가 신문 펼치신 곁에서 어꺠 너머로 한글을 깨우쳤다.


우리 집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넓은 풀밭을 지나 아버님이 다니시는 동아일보사가 있었고 나는 심심하면 그곳에 놀러갔다. 또 길 건너 작은 한옥에 사시던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의 시인 노천명님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파리한 얼굴로 맞아주시던 그분은 자리 보전하고 일어나지 못하시며 '왔냐'고 작은 소리로 기운 없이 말하였다. 나는 그때 생전 처음으로 시인을 만났다. 주위에 그렇게 아픈 사람을 못 봐서 어린 마음에 시인은 생각을 많이 해서 몸이 아픈가보다 생각했었다.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이 일어나 일본이 민족지인 동아일보를 정간시킴으로써, 그런대로 평온했던 우리 집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우리는  신문로 1가 덕수 초등학교 아래 한옥으로 이사했다.


이제는 아버지가 요주의 인물이 되어 골목 건너 '서울 여관'에 일본인 형사가 상주하며 우리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문소리에도 우리집을 향한 창문을 살짝 열고 염탐하면, 나는 확 돌아보며 한참을 지지 않고 노려보며 눈싸움을 했다. 이를 보시던 어머님이 그 사람도 한국 사람이니 그러지 말라 하셨다. 그 형사는 아버님은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렀다.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가장 못된 짓 중의 하나는 1940년 창씨개명이다. 전통지명도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치고,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 대신 일본식 이름을 지어 쓰라고 강요한 것이다.


일제의 강요에도, 우리 집에서 이것은 통하지 않았다. 아버님의 말씀인즉 '박기숙'만큼 예쁜 이름이 어디 있는가 하시면서, 껄껄 웃으셨고 끝까지 버티셨다. 갖은 핍박을 받으며 끝까지 불응한 사람이 5%이었다고 들었다.


지난 휴일 둘째 사위가 광화문에 드라이브 나가자고 전화가 왔다. 장모가 어릴 때 자란 곳이라고 마음을 써준 것이다. 청계천 광장에 나와 동아일보사를 보니 그 옛날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5층 건물이 지금 빌딩 사이에서 작아져 버려 마음이 아려왔다.


반세기 전 보다 네 갑절이나 넓어진 서울 전역을 1900년에 설치한 전차가 다녔다. 서울의 명물 전차 길을 사통팔방 '땡땡' 소리를 울리며 지나가던 정겨운 소리, 그 추억의 멜로디가 환청처럼 귀에 울린다. 그리고 고층빌딩 사이 종로통을 바라보면서  어머님과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있던 화신백화점 나들이가 기다려져 떼를 쓰던 어린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육조거리 너머 광화문, 그 너머 결복궁과 삼각산허리에 걸린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을 하염없이 쫓고 있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보빌딩 이마에 걸린 포스터를 읽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대를 넘나들며 우루루 몰려왔다가 우루루 몰려가 버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오늘도 광화문은 시끌거린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펄펄 살아 움직일 듯이.


옮긴이)

작가의 꿈을 키우시다 만 80세에 신예작가로 등단하신 할머니의 글들. 첫 수필집  <꿈은 늙지 않는다> 에서 발췌하였다. 책은 할머니가 즐겨하시는 꽃누르미 삽화 덕에 향기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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