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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람 Jul 11. 2015

회색빛 기억의 조각들

패트릭 모디아노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혹시 그는 나를 알아볼 것인가?
매번 나는 같은 희망을 품고 매번 실망한다.
그는 눈을 깜빡거렷다.
"프레디라……."
그 순간 나는 정말로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레디요? 그 사람은 이제 여기 있지 않은데."
아니다.
그는 나를 알아본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판타지적이면서도 느낌 있어 보이는 책의 제목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 책의 제목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일까 생각하다가 책의 중반부쯤에서 한 거리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회색빛 잔재가 느껴지는 이 책은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자신의 이름도, 과거도, 지인들도 하나도 떠올릴 수 없는 기라는 남자는 위트라는 남자와 함께 탐정 사무소를 운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위트가 탐정 사무소를 닫게 되고 갈 곳이 없어진 기는 자신의 기억을 찾아 떠난다.


흔적을 조금씩 더듬어 여러 사람을 만나며 항해하는 기억의 항로는 언뜻 쓸쓸하기도 하고 , 아련하기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추억들에 아프기도 했다.


나는 누구일까.

만약 나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채 어느 순간 어디엔가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나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소설의 첫문장이다.

자신을 나타내는 기억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공허함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었을 기.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첫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이 또 하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배경이 2차 세계대전 당시라는 거다. 기억을 잃은 기가 존재하는 세상은 세계대전이 끝난 후지만 페드로가 존재하는 세상은 2차 세계대전 당시다.

어지러웠던 시절, 엄격한 신분 검사, 때문에 페드로와 그의 친구들은 프랑스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심각하고 혼란스러웠을, 그리고 알 수 없는 공허로 가득했을 그 당시의 기록이 페드로의 시점에서, 기의 시점에서 차분하게 묘사된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억이 존재하지 않기에 기는 자신의 친구였을지 모르는 옛 사람을 만나면서도 마음 놓고 반가워할 수가 없다. 아무 감정도, 기억도 없는 상황에서 문득 그 서글픔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서 나는 그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옛 추억의 잔재들을 손에 쥐었다가 어쩔 수 없이 흘려 보낼 때마다 어쩐지 슬퍼졌다.


거의 마지막에 다다라 기는 과거의 기억이 분명할 것들을 떠올리지만 여전히 그는 명확한 자신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 흔적임이 확실한 친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의 믿음처럼 나 또한 그가 어딘가에 유유자적 몸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기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기억을 찾아 헤맬 것이다. 마치 회색빛 안개를 쫓듯 그렇게.

나는 옛날에 우리가 식사를 하곤 할 때 이 방이 어떠했었는지를 상상해보려고 애를 썼다.
내가 하늘을 그려넣은 천장, 저 종려수를 그려넣어서 열대 지방의 기분을 내려고 했던 초록색의 벽.
유리창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우리들 얼굴 위로 떨어지곤 했었지.
그렇지만 그 얼굴들은 어떻게 생긴 것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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