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 파과
그런데 그 뒤로도 그는 가끔 궁금했던 게 있다.
그녀는 왜 그렇게 정성스럽게 제대로 된 약을 챙겨주었을까.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약을 바꾸거나 조작하여 어린애 먼저 보내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다만 방역 대상이 아닌 자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러기엔 품이 상당히 드는 일.
그야말로 아무거나 주워 빻아다가 밀가루랑 섞어 약이라고 갖다 안겨도 모를 일이었는데.
"아…… 덥다."
그 혼잣말에는 짜증이나 나른함 대신 흥건한 물기와 작고 가벼운 흥분이 배어 있다.
책을 한 장 두 장 넘겼을 때, 자연스럽게 「설계자들」이 떠올랐다. 파과에서는 설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방역자가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지만 그냥, 누군가의 생명을 단절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과 그 사이의 군상을 보니 꼬리처럼 떠올랐다.
책 속의 주인공은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년의 여인이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보통 이런 유의 소설들은 젊고 아름다운 주인공을 내세워서 그에 얽힌 사연과 사랑, 갈등 등을 다루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는데 60살이 넘은 할머니라니. 사실, 이 나이대의 사람이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어울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녀의 담담함과 차분함, 어딘지 모를 초연함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투우라는 30대 초반의 남자.
주인공, 조각에게(이름이 조각이다. 물론, 가명)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는, 왠지 위험함이 물씬 풍기는 남자. 척 봐도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나는 남자가 등장 한다.
이야기는 조각과 투우의 과거, 두 사람의 만남과 엇갈리는 생각들. 감정의 편린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읽는 내내 어떤 초조함과 서늘한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투우는 계속해서 조각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끝없이 자극해 간다. 그녀의 변화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알아채며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밀어 붙인다.
처음에는 무시해도 좋을 늙은 여자에게 뭐가 아쉬워서 저러나 싶었다. 그게 조금 아니꼽기도 하고 어딘가 신경이 거슬려서 삐뚜름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네가 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는 느낌.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솔직히 말하자면, 조각보다도 이 남자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이 남자의 과거가 나오면서 그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과거 속에서 드러나면서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하고 잡히는 것들이 몇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애 같은 이 남자가 어째 안쓰럽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돌아봐 주지 않을 텐데 뭐 저리 애쓰나 싶어 안타까움이 물씬 느껴졌다.
막말로, 투우가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조각의 마음 속에는 이미 그가 머물 자리가 없을 텐데…….
어쩌면 누구도 돌봐 주지 않던 자신에게 정성스레 약을 먹여 주던 여자에게 느낀 어머니의 정일 수도 있고 분위기에 휩쓸린 사랑일 수도, 자신은 못하는 것을 가뿐하게 해내던 여자에 대한 동경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 하나로 조합해 보면, 나는 당신을 본 순간 그녀라는 걸 알았는데 왜 당신은 나를 몰라주느냐는 오기.
읽는 내내 가슴 안 쪽에 공허함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공허와 어딘가 막연한 서글픔.
조각이 투우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를 읽고 나서야 그게 아련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발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는 애초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거다. 그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데도 결말에 대한 작은 불만이 차오르는 걸 보면 내가 두 사람을 아주 많이 좋아했나 보다.
그래도 역시…… 결말은 그것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합니다. 그건 나 때문입니다.
내 눈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눈으로 심장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실은 나 자신도 왜 그것이 표적이 될 만한 이유인지 켯속을 모르겠지만 하여튼 놈은 그게 불만이랍니다.
조각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침착하게 약속했을 뿐이다.
"내가 아이를 찾아오겠어요. 어떻게든 돌려주겠다고요. 이 상황에 말한다고 믿음이 갈 리 없겠지만 나 믿어보세요. 하여튼 경찰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