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팀에 들어갔고, 팀원들과 각자의 '업무 사용 설명서'를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내가 하는 일과 나의 업무 방식을 문서화해서, 같이 협업하는 사람이 각자에 대해 미리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업무 사용 설명서 중 나의 업무 방식 부분을 적다가, 문서에 다 담기 힘든 자잘한 설명을 나의 개인 공간에 자세히 적어보려고 한다.
나도 처음부터 단어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된 배경을 설명하자면, 석사를 하면서 많은 장표를 만들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바가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상황을 자주 경험했다. 사람들이 내 장표를 보고 갸우뚱한 후에, '장표 읽지 말고 그냥 너가 말로 설명해봐!'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말로 설명을 했을 때는 또 모두가 제대로 이해하는 놀라운 일이 계속되었다.
장표로 생각을 전달하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내 머릿속에서 100번 생각해서 나온 단어가 다른 사람에게는 처음 듣는 단어이거나,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장표의 리드 카피(제목)가 장표 내용의 일부만 다루는 경우가 많아서, 듣는 사람들은 왜 이 내용이 여기에 나오는지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설명하는 것을 상대방이 더도 덜도 말고 딱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워딩에 집착하게 되었다.
며칠 전 유튜브로 스티브 잡스의 모두가 아는 그 유명한 키노트를 보다가, '아! 이게 완벽한 설명이지!'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유명한 "An iPod, a phone and an internet communicator"가 나오기 직전에, iPod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스티브 잡스는 Widescreen iPod with touch contol이라는 설명을 했다. 모두가 똑같은 모양을 생각하는 iPod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변경 사항에 대해 수식어(widescreen, with couch controls)를 붙였다. 이 설명을 본 사람들은 '기존 iPod에서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크린이 더 커지고, 이전처럼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닌 터치로 컨트롤하겠구나.'라고 구체적인 모습과 기능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만약 이 장표에서 새로운 기기, 차세대 기기, 스마트 기기 따위의 단어가 나왔다면, 사람들은 "An iPod, a phone and an internet communicator"가 나올 때 박수를 칠 수 있었을까? 머릿속에 구체적인 형상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iPhone 이미지가 나온 후에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특히 처음 읽는 신규 입사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 내가 주로 집착하는 부분은 아래 세 가지이다.
1. 제목이 하위 내용을 전부 포괄하는지
예를 들어, 이 글은 내가 싫어하는 것도 적은 글이기 때문에 제목이 [xxx 업무 사용 설명서 >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안된다. 이 글이 어떤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제목만 보고 들어왔다면 시간 낭비할 가능성이 커진다.
2. 배경 설명 없이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단어를 쓰지 않았는지
새로 기획하고 개발하는 기능의 이름을 mvp, 최신 기능, new 기능 등으로 짓는 것
우리 팀원 모두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름으로 서버 이름을 짓는 것
구글 또는 슬랙에 검색했을 때 원하는 정의가 첫 페이지에 나오지 않는 약어를 사용하는 것.
KBF 가 Key Buying Factor인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냐는 말이다! 구글에 KBF라고 치면 대한 당구 연맹, 대한 권투 연맹이 나온다...
3. 중요한 글은 꼭 맞춤법 검사를 해보자
2명 이상이 참여하는 회의를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회의의 주최자가 문서나 발표 자료를 만들어 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논의가 이런 준비를 바탕으로 시작되는 건 아니다. 준비 없이 논의가 시작된 경우에는, 회의 참가자 중 그 누구라도 이 회의를 제대로 이끌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특히 토론의 장이 펼쳐지고, 각자의 의견이 다른 경우, 그리고 어느 순간 했던 얘기를 두 번 세 번 하면서 논의가 돌고 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때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의라면 이렇게 말한다. '누가 화면 좀 공유해주세요. 아니면 제가 할까요?'
업무 회의는 자신의 의견을 세워서 남을 이겨먹는 토론이 아니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목적인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 공유된 화면이 없으면 모두가 자기의 생각만 얘기하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은 잘 들리지 않고, 혹시 들리더라도 그 의견이 다양하면 대화의 흐름을 잡기 어렵다. 이런 때 모두가 공유하는 화면이 있으면 흐름을 잡기 훨씬 편해진다. 같은 시각물을 보기 때문에 의견, 반박, 대안 제시가 더 구체적으로 가능해진다.
화이트보드든 키노트 화면이든 메모장이든 뭐라도 빨리 띄워야 모두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위에 두 가지는, '저와 협업하실 때 이건 꼭 신경 써주세요'라고 말하는 부분이라면, Quick and Dirty는 '저는 이렇게 일해요'라고 알려주는 부분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은 상태로 말만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을 안 좋아한다. 사업 제안서든 리서치 결과든 프로토 타입이든, 그냥 와이어 프레임이라도...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재료를 갖고 얘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최소한의 재료를 만드는 데에 쏟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써 120%를 다해서 만들었는데 내부에서 '아, 이건 가능성이 적은 것 같아.'라고 하면 얼마나 아까운가. 30%만 다해서 만들었어도 그 가능성을 보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다. 방향성 판단을 위한 최소한의 가시성을 확보하면서, 리소스는 최소로 들일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좀 지저분하고 부족하더라도, 논의를 할 수 있는 정보나 기능을 담은 재료가 있으면 앞으로 고도화할지 말 지 빠르게 결정할 수 있다.
물론 대중에게 나가는 제품을 quick and dirty 하게 만들자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팀이 아니면 quick and dirty한 결과물을 이해해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