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ft Left는 틀렸다.

우리는 지금 Expand Left를 당하고 있다

by 구형라디오

제조업은 긴 마라톤이다.

선행 개발(연구소), 기획(영업마케팅), 프로토타입(개발), 엔지니어링 샘플(개발), 고객 평가 샘플(개발), 승인(품질), 양산(제조).


각 단계는 고도로 나뉘어 있고, 그래서 조직도 나뉘어 있고, 그래서 R&R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 질서를 무력화시키는 말이 하나 있다.


“Shift Left.”


문제를 앞에서 보자는 말, 예방 중심으로 가자는 말.

슬로건으로는 그럴듯하다. 전략 문서에 쓰기에도 좋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 말은 이렇게 번역된다.


“네 일은 그대로 두고, 앞 단계 일도 같이 봐라.”


이건 Shift가 아니다.

업무의 이동이 아니라 업무의 추가다.


Shift가 아니라 Expand다


Shift라면 위치가 바뀌어야 한다.

내 업무의 일부가 앞 단계로 옮겨갔다면, 그만큼 뒤 단계의 누군가는 내 기존 업무를 가져가야 한다.

그래야 전체 업무량은 유지되고 역할의 중심만 이동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오른쪽 업무는 그대로다.

왼쪽 업무가 새로 붙는다.

그리고 그걸 “관점 확장”이라고 부른다.

이건 Shift Left가 아니라

그냥 Expand Left다.


듣기 좋은 전략 용어 뒤에


“일은 더 할 사람”이라는 전제가 숨어 있을 뿐이다.


확장은 협업이 아니라 Overlap을 만든다


왼쪽으로 계속 확장하면 조직 간 경계는 무너진다.

처음엔 “같이 보자”로 시작하지만 곧 “왜 그걸 미리 안 봤냐”로 바뀐다.


두 조직이 겹치고, 세 조직이 겹치고, 결국 모두가 관여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영역이 생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겹침을 정리하는 역할은 아무도 맡지 않는다.


경계는 흐려지는데 책임은 또렷해진다.

그리고 그 또렷한 책임은 늘 실무자에게 떨어진다.


“앞을 보라”는 말의 전제 조건


앞 단계를 이해하는 건 분명 도움이 된다.

양산 담당자가 개발을 알면 좋고, 개발자가 영업을 알면 더 좋다.


문제는 순서다.

지금 당장 현관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 “내년 홍수에 대비해 도로 배수로 낙엽이 있는지 확인하자”는 말은 전략이 아니라 현실 감각 부족이다.


앞을 보려면, 지금 일을 감당할 여유부터 있어야 한다.


여유 없는 확장은 역량 향상이 아니라 번아웃의 지름길이다.


Shift Left라는 말이 편리한 이유


Shift Left라는 표현은 영리하다.

아무도 반대하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 품질을 더 좋게 하자

• 문제를 미리 보고 예방하자

• 협업을 강화하자


누가 여기에 반대하겠는가.

하지만 그 말 아래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다르다.


• 업무는 줄지 않는다

• 책임은 흐려진다

• 경계는 사라지는데 담당자는 늘어난다

• 품질이 좋아질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이 구조를 정확히 부르는 이름은 Shift가 아니라 Expand이다.


그럼 진짜로 하려면 최소한 이것은 필요하다


계속 Expand Left를 할 거라면, 최소한 솔직해져야 한다.


• 기존 업무를 줄이지 않으면 확장도 없다

왼쪽을 보라면, 오른쪽 일부는 공식적으로 내려놔야 한다.


• 확장은 ‘참여’이지 ‘주 책임’이 아니다

1차 책임 조직은 명확히 두고, 나머지는 보조여야 한다.


• 확장의 끝을 정해야 한다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기준이 없다면 결국 “다 알았어야지”라는 말만 남는다.


이 장치 없이 하는 Expand Left는 협업이 아니라 책임 전가 구조에 가깝다.


이건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실무자가 앞 단계를 보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한계까지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Shift Left는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설계 없는 Expand Left는 사람을 태워서 굴리는 운영 방식에 가깝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정말 “이동(Shift)”인지, 아니면 “추가(Expand)”인지.


이 질문을 피하는 한, 현장의 피로는 계속 쌓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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