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자신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 큰 소리로 말함을 알아채기
‘마음’은 ‘마음’의 일을 하도록 두면서, ‘나’는 ‘나’가 하고 싶은 것 또는 해야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피부 안의 세상’에서 떠오르는 생각, 감정, 그리고 기억을 무시하라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수용’은 ‘합리화’ 또는 ‘포기’가 아닙니다. ‘마음’은 ‘마음’의 일을 하면서 ‘나’가 ‘나’의 일을 하는 것은 ‘피부 안의 세상’과 ‘피부 밖의 세상’의 맥락을 분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부 안의 세상’과 ‘피부 밖의 세상’에서 흰곰을 만났을 때,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피부 안의 세상’에서는 ‘수용’과 ‘마음챙김’의 과정으로, ‘피부 밖의 세상’에서는 ‘전념’과 ‘행동 변화’의 과정으로 살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흰곰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할수록 더 자주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은 불편한 생각, 감정, 그리고 기억이 떠오를 때 그것들에게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불편한 생각, 감정, 그리고 기억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마음’은 생각, 감정, 자기-판단, 감각, 그리고 기억들을 끊임없이 속삭이며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나’가 알아차려 주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말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마음’은 ‘마음’이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좀 더 열심히 그 일을 할 뿐입니다. ‘마음’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나’를 초라하고 작아지게 만드는 흰곰이 없으면 좋겠지만, 말로 흰곰을 만드는 것이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또, ‘마음’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흰곰들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나’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떤 흰곰은 다른 생각들보다 ‘나’를 더 불편하고 불안하게 해서 ‘피부 밖의 세상’의 흰곰을 만났을 때처럼 도망치고 싶게 만들기도 합니다. 도망치고 싶게 만들 만큼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면 ‘나’가 ‘마음’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때문에, 가끔 ‘마음’은 ‘나’가 무서워할 만큼 커다란 흰곰을 만듭니다. 그전처럼 도망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면 흰곰은 ‘나’에게 ‘마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쪽지를 건네줍니다. 그 쪽지에는 ‘나’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가치’가 쓰여 있습니다.
‘피부 안의 세상’에서 ‘마음’이 만들어내는 흰곰은 다양합니다.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일이 예정대로 풀리지 않아서 짜증이 날 때, 중요한 일을 앞두었을 때, 큰 결심을 해야 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헛물을 켜고 있는지는 않는지 자괴감이 들 때, ‘피부 안의 세상’에서는 흰곰이 찾아오고 ‘피부 밖의 세상’에서 ‘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전처럼 그 흰곰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갈지, 아니면 그 흰곰과 함께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며 해야 할 것 또는 하고 싶은 것을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흰곰과 함께 지금 이 순간에 머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한 번의 행동은 다만 한 번의 행동일 뿐, 내가 가진 문제는 한 번의 행동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이 속삭이는 불편한 감정, 생각, 그리고 기억을 피하거나 없애려고 하는데 썼던 시간과 힘을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하는데 쓸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흰곰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한 경험은, '흰곰'이 나타났을 때 피하려고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걸어가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 줄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는 불편한 흰곰 앞에서가 아니라 그 흰곰 너머의 진정한 삶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