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러 가기 전부터 불안불안했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하지만 워낙 오래전부터 나온 떡밥과 관련된 영화이기도 하고, 앞으로 계속해서 마블 영화를 보게 될 텐데 페이즈 4의 시작이라는 영화를 보지 않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결국 보러 가게 되었다. 하지만 <샹치>는 생각보다 더 불편한 영화였다. 일단 서양이 동양을 그릴 때 결코 버리지 못할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청렴한 사람들에 대한 환상'은 제쳐 두고서라도 말이다.
과거 마블이 사용했던 중국 출신 악당에 대한 성의 없는 작명에 대한 자아 비판도 있었고, 중국 이민자들이 경험하는 차별에 대한 은유도 적당히 들어 있었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필자의 첫 번째 아쉬움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흑인 히어로를 다루었던 <블랙 팬서> 속의 와칸다는 첨단 문명 국가였다. 오히려 일반적인 서양 국가들에 비해 훨씬 우수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흑인에 대한 편견을 다루는 대신 비밀스레 힘을 감추어 왔다는 설정을 이용한다. 늘 얕잡아보이던 설움을, 압도적인 모습의 등장으로 해소한다. 하지만 <샹치>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이고 때로는 뒤처져 있다. 이민자로서, 이방인으로서 겪었던 차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샹치>는 히어로 영화였다. 히어로에게는 물론 시련과 고난의 서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샹치의 서사에는 이미 아버지에게 강제로 살인 교육을 받다가 홀로 탈출한 고난이 넘치도록 들어 있다. 이민자로서 경험했던 설움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멋진 서사를 완성하기에는 충분했다. 차별받던 이들의 아픈 기억을 다루는 데 있어서 오 분도 안 되는 술자리 한담은 과연 충분한가? 다루어야 했다면 더욱 묵직하게 다루었어야 했고, 그럴 시간이 없었다면 <블랙 팬서> 때처럼 아예 그간의 일들을 비웃듯 날아오르게 했어야 했다. <샹치>는 둘 다 실패한 셈이다.
배경은 또 어떤가. 샹치가 발을 디디는 마카오의 밤에는 오로지 유흥과 향락의 불빛만이 가득하다. <블랙 팬서>에서 그렸던 한국의 밤 역시 그와 비슷했다. 샹치의 아버지, 웬우(양조위)의 집을 습격하는 적들은 체계와 작전 없이, 그야말로 깡패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머릿수로 밀어붙인다. 딱 뒷골목 깡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즘의 우리나라에서는 먹히지도 않는 옛날 이야기다.
다시 말해, 이 영화 속의 동양은 신비롭지만 동시에 어딘가 낡아 있다. 웬우가 아내의 복수를 위해 찾아가는 적 조직의 본거지는 옛 홍콩 영화 속에 등장해야 할 것처럼 낡고 빛바래 있다. 샹치의 여동생이 일궈낸 언더그라운드 파이트 클럽은 높다란 마천루 빌딩 안에 있으면서도 곧 무너질 것처럼 녹슬어 있다. 동양은 어째서 매번, 그렇게 녹슨 쇠창살과 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그려져야만 하는가?
또 다른 주 무대, 신비의 마을인 탈로. 이곳에서 필자는 두 번째로 실망했다. 지나칠 정도로 초가집으로만 채워 두었다는 점도 아쉬웠지만, 더욱 실망이 컸던 건 만다린의 대역을 맡았던 서양의 배우가 모리스라 부르며 귀여워하는 동물 때문이다. 그 동물의 이름은 제강, 중국 신화에서 혼돈을 상징하는 신적 존재다. 단순한 상상 속의 동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신화 속에서, 제강은 앞을 보지 못하고 냄새를 맡지 못하는 그를 가엽게 여긴 다른 두 친구 신, 숙과 홀이 몸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주게 되면서 사망한다. 이 이야기는 아무런 가공 없이 자유로웠던 원시의 우주에 인간이 손을 함부로 대었을 때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도가의 '무위자연'을 암시하는 유명한 우언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태초의 신화 시대에서 인간의 질서가 지배하는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신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중요한 신에게 함부로 서양의 이름을 달아 준 것으로도 모자라 인간을 따라하며 죽은 척 시늉하는 장면을 농담처럼 삽입한 <샹치>의 몰이해가 참으로 돋보인다. 더불어 제강은 중국의 그림에서 대부분 선화로 표현되거나, 채색본의 경우 붉은 털빛에 검은 날개 혹은 붉은 날개를 가지고 있다. 당장 네이버 검색창에 혼돈 제강을 입력하기만 해도, 붉은빛의 제강 이미지가 가득 등장한다. 푸른 날개에 잿빛 몸체를 가진 제강은 다름아닌 일본의 자료 <괴기조수도권>에 등장하는 모습이다. 자료조사를 얼마나 대강 했으면, 그 유명한 모습조차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하고 일본풍으로 만드는 것인가. 중국 설화의 기본인 <산해경>만 한 번 찾아봤더라면, 하다못해 중국 신화를 연구하는 연구자에게 한 번 묻기라도 했더라면 제강이 무리를 지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왼쪽이 중국의 전통적인 제강의 모습, 오른쪽이 일본의 <괴기조수도권> 속 제강의 모습.
뿐만 아니라 탈로에는 주작과 구미호가 공존하고, 신수 중에서도 가장 신성하게 여겨지는 기린이 무리를 지어 돌아다닌다. 서양 신화에서 신비로운 동물은 인간의 손에 길러지는 형태 혹은 길들여지는 형태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동양 신화에서 상서로운 동물들은 신적 존재이며, 대개 그 개체 수가 상당히 적은 것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마블 제작진은 전혀 몰랐던 듯하다. 신수마다 거주 지역 역시 다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 역시도. 다시 말해, 신비로운 마을 탈로는 원천 신화를 모조리 해체하는 듯한 공간이었다. 각국의 신화를 상당히 사랑하는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허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작중에서 데스 딜러(샹치를 가르치던 가면 쓴 교관)는 분명 경극 가면을 쓰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용하는 무기는 일본 닌자의 단도인 '쿠나이'로 보인다. 손잡이 뒤편에 달린 둥근 고리와 손잡이를 감은 천, 끝이 잘린 마름모를 닮은 칼날까지. 중국의 단검 혹은 비수와는 완전히 다른 모양새다. 오차 하나 없는 일자 앞머리 똑단발에 허리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처음 등장하는 샤링(샹치의 여동생) 역시 동양, 그것도 일본 쪽에 조금 더 가까운 스테레오타입이라는 부분 역시 아쉬운 점이다.
왼쪽부터 일본 단도 쿠나이(나루토에 등장), 샹치 포스터 속 데스 딜러의 손, 마블 공식 피규어 데스 딜러에 포함된 단검.
그리고 마지막 탈로에서의 텐 링즈와 마을 사람들의 전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른 차원의 공격법이 필요한 다크 드웰러와의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을 사람들이 서양식 무기를 든 텐 링즈에게 밀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레이저피스트는 샤링과 합의를 마친 후 부하들에게 마을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신의 무술을 익히며 은둔해왔다는 마을 사람들이 전기충격 계열의 무기 앞에서 지나치게 쉽게 무너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샹치 남매의 어머니 장 리와 이모 장 난이 특별히 수호자에게 힘을 받아 유별나게 강한 것이라고 가정해도(그런 장면은 사실 등장하지도 않는다)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서 샹치에게 나가라고 말한다거나 사람들에게 활을 가르치는 등 장로와 같은 면모를 보이던 광보가 지나치게 쉽게 작은 다크 드웰러에게 순식간에 당하는 건 설정과 상당히 동떨어져 보인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오리엔탈리즘을 벗어 던진 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색한 중국어나 때에 어울리지 않는 영어 사용은 확연히 줄어들었고, 메인 캐릭터는 대부분 중국인으로 꾸려져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할리우드는 동양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 중국, 일본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제대로 알아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건 아닌가?
이왕 중국 배경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면 중국 배경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촉수 등 서양적인 요소가 배제된 형태의 다크 드웰러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테고, 보다 중국적인 이름을 부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텐 링즈의 본거지를다 낡은 중국의 고성처럼 그리기보다는 중국이 과거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던 시절처럼 압도적인 성을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음울한 악역의 성이라 해도 그걸 꼭 낡은 무채색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샤링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은 조금 더 현대적인 모습으로 그렸더라면 샤링이 홀로 일궈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천루 가득한 마카오에 보다 더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말이다. 탈로의 경우 가운데 건물에만 황금빛 기와를 얹는 대신 다른 건물들에도 보다 더 신경써서 지었더라면 산골 마을의 이미지 대신 수호자들의 마을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 신화 속 신선들의 존경을 받는 여신 서왕모는 곤륜산의 화려한 궁전에 산다. 동양의 신비는 '청렴'한 초가지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필자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이유들이다. <블랙 팬서>의 와칸다를 만들어내는 데 들인 노력의 반만이라도 샹치와 탕로에 써 주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은 영화가 탄생했을 것이다. 첫 마블의 동양 히어로 솔로 무비에 거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 역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