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과 버섯구름
#성냥과버섯구름 #학고재 #구정은 #오애리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 한 휴대전화 제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한두 달 빡세게 돈을 벌어 친구들과 어딘가로 놀러갈 계획이었다. 24시간 가동되던 그 공장에서 2교대로 12시간씩 일했다. 교대는 오전과 오후 10시에 이루어졌는데, 오전반은 그럭저럭 버텼지만 저녁반에 걸릴 때는 말 그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헤드뱅잉하며 졸다가 일하다가 했다. 어찌나 힘들었는지 젖살이 쪽 빠져서 친구들이 “너 대학 간다고 다이어트했냐? 어떻게 살을 이렇게 뺐어?”라며 놀라워했다.
일은 어려울 것 없는 단순노동 현장이었다. 한번은 책상에 네다섯 명씩 모여 앉아 휴대전화 메인 판에 작은 부속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작업반장 언니는 우리에게 동그랗고 작은 그 부속을 집게로 집어 접착제가 붙은 판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양손에 장갑까지 낀 데다가 집게로 그 작은 것을 집는 섬세한 작업에 초짜인 우리는 아주 굼뜨게 움직였다. 지난하게 남은 하루치 작업 일정을 꿰고 있던 그 언니는 우리를 답답해하다가 옆자리에 앉더니 초스피드로 작업을 속행했다.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그 작은 것들을 척척 잡아 판 위에 붙여나갔다. 그때 나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 그에게 “언니 장갑 안 껴요?”라고 물었는데, 그는 “그러면 느려져”라고만 대답했다. 그 부속이 담긴 통에는 해골 모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언젠가 그 언니에게 “언니는 왜 여기서 일해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돈 많이 벌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너무 어렸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언니는 정규직이었을 테니 아르바이트생인 나보다는 많이 받았겠지만, 하루 12시간씩 2교대로 밤낮 근무하고 해골 모양이 그려져 있는 물건을 맨손으로 만져서 받는 일당으로는 너무한 월급을 받으리라는 사실이 빤했으니까. 난 열여덟 살이었고, 인생의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속으로 ‘여기 언니들은 왜 대학을 가지 않고 여기서 일하는 거지?’라고 생각해 그 의문을 담은 얼빠진 질문을 건넨 것이다. 한참 어린 여자애, 곧 떠날 아르바이트생, 예비 대학생 등 무지의 옷을 겹겹이 입고 있던 내게 일일이 설명할 이유를 찾지 못한 그 언니는 “돈”이라는 즉각적인 단어로 응축해 건넨 것일 테고.
<성냥과 버섯구름>을 읽으며 그 언니가 떠올랐다. 한 소녀가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성냥을 긋다가 동사해 사랑하던 할머니를 하늘나라에서 재회한다는 내용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헐벗은 여공들의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한 비유라는 사실, 성냥에 여공들의 호흡기에 치명상을 입히고 뼈와 살을 녹게 만들어지는 역사(<성냥과 버섯구름>, 34~44쪽)가 담긴 줄 알았더라면 나는 그 언니에게 “왜 여기서 일해요?” 따위의 무례한 말을 던지는 사람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26,400리터 물을 소비해야만 커피 1킬로그램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같은 책, 209~217쪽) 나는 주변의 사소한 물건들을 대충 쓰고 빨리 새 것으로 교체해버리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을 테다. 우리가 쓰는 작은 물건들 안에는 수많은 이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러니 그것들을 사소하다고 폄하할 게 아니라 오롯이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을 말하려던 게 아닐까.
휴대전화 공장의 그 언니는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여전히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까? 바라던 대로 돈은 많이 벌었을까? 그 해골 모양이 그려진 물건을 자꾸 만지는 바람에 병에 걸리지는 않았을까? 지금은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만난다면 그때 무례한 말로 상처를 건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