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삼촌은 조현병이었다. 정신 관련 질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를 돌볼 만한 물정 모르는 여성과 결혼시키려다가 실패했고, 이후에는 본인들이 아들을 데리고 살았다. 어린 내가 본 삼촌은 집에서 가장 조용하고 순한 어른이었고, 그 어떤 트러블도 일으키는 법이 없었다. ‘아빠의 다섯 형제 가운데 왜 삼촌만 작은아빠가 아닌 삼촌일까?’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세상은 결혼으로 어른과 비어른으로 나눈다는 사실을 모르던 때다.
그러니까 삼촌이 삼촌이었던 이유는 가족 내에서 어른으로 분류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어른이 그를 답답하고 모자란 사람이라 여겼다(엄마 말로는 공부도 잘해 4년제 대학까지 간 사람인데). 가끔 아빠가 전화로 삼촌에게 언성 높이며 뭐라 했던 기억도 난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정신 질환에 대해 잘 모르던 그의 형제들은 삼촌을 그 시골집에 혼자 살게 했다. 각자 눈앞에 주어진 자기 삶이 버거워서였겠지만, 삼촌 입장에서는 사실상 방치였다.
혼자 있으면서 삼촌은 점점 이상해졌고,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를 내용들을 자꾸만 주변 사람들에게 문자로 보냈다. 나에게 전화해 무언가를 얼른 피하라고 했던 것도 기억한다. 명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대충 얼버무리고 끊은 다음에 엄마에게 가서 삼촌이 또 이상한 말을 한다고 고했던 것 같다.
처음에 어른들은 삼촌에게서 폰을 빼앗았고, 나중에는 병원에 가두었다. 엄마는 삼촌 번호를 차단하라고 했다. 어린 나는 그저 더는 이상한 문자를 받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땅에 ADHD로 태어나》를 읽으며 나는 삼촌을 떠올렸다. 병은 다르지만, 정신 질환 당사자가 생에 누수가 생기지 않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세상과 섞이려 부단히 애쓰던 과정들이 삼촌에게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화 속 발봉이는 병명을 진단받고 자신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간 자신이 행했던 빌런 짓들이 사실은 ADHD 증상임을 깨달았고, 약을 먹은 뒤로는 후련하면서도 슬펐다고 말한다.
나 또한 내 병명을 진단받았을 때 슬프면서도 기뻤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아등바등했던 내가 안쓰러워 슬펐고, 내 문제에 이름표를 붙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이제 나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울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버린다. ‘우울증 때문인가 보다.’ 그러면 나는 나를 조금은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정신 질환이 그간 소홀했던 나와 화해하는 틀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혼자 방치되어 있던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삼촌에게도 스스로 병을 발견하고 진단받을 기회가 주어졌다면 덜 외로우셨을 텐데, 어쩌면 내 기억 속 그 순한 삼촌의 모습으로 여전히 곁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이해한다는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였다. 나의 약함을 이해하고, 우리의 약함을 이해하고, 그렇게 서로의 간극을 좁히는 것. 이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늦었지만 이제라도 삼촌을 사랑할 기회를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