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보듬는 법
리아가 아픈 지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순간 참지 못하고 반려인에게 쌓였던 짜증을 토해낸 적이 있다. 잘 견디던 리아가 다시 토를 시작해 한껏 예민해진 날이었다. 몇 주째 가사노동을 혼자 감당하고, 반려인을 기다리다가 식어버린 저녁을 연거푸 먹던 나날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그에 대한 연민으로 기꺼이 자처했던 집안노동이 점점 ‘왜 나만’으로 바뀌었다. 가사노동에다가 아픈 고양이 돌봄노동이 겹치니 어느 순간 마음속에 수많은 화를 쌓아두었던 것 같다. 한 번 터진 화는 나를 극단으로 몰아세웠다. 리아 화장실을 치우면서 혼자 생각했다. ‘이럴 바에는 혼자 사는 게 낫지 않나.’
몇 주 전부터 반려인은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얼른 병원 가’라는 말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온통 12시간에 한 번씩 약을 먹여야 하는 리아의 상황과, 점점 부풀어오르는 리아의 배와,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같은 것들로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 그마저 간병하기 버거울 것 같아서, 이번 연휴 동안 본가에 내려가라고 권했다. 그 권고는 그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나의 편리함을 위한 선택이었다. 리아는 내가 없으면 안 되지만 그는 생각이 있는 성인이니까, 스트레스성 두통일 테니 시골에서 쉬면 더 낫겠지. 내 편한 대로 생각했다. 이제 와서 드는 후회이지만, 그때 병원으로 등 떠밀어야 했다.
그가 없는 사이에 리아는 수술대에 올랐다. 반려인과 연락이 잘 안 닿아서, 수술 여부를 혼자 결정하고, 입원 대기, 수술, 병문안까지 감당했다. 조금 서운했지만 어쩌다 연락이 닿는 반려인 목소리가 너무 희미해서, 꼭 조만간 꺼질 것 같은 촛불 같아서 그 감정을 입 밖으로 내놓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당신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당신 부모님이 잘 돌보아주시겠지. 나는 리아 돌보느라 바쁘니까. 그렇게 우선순위에서 밀어두었다. 소외된 그는 내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리아와 나는 오후 2시 30분에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수술하고 수술 후 회복실에서 눈 뜨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에 병원 밖을 나서니 저녁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껏 지친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뻗어버렸다. 자고 일어났더니 전화가 스무 통 넘게 와 있었다. 반려인을 새벽에 응급실로 옮겼다는 내용이었다. 오전에는 동물병원으로, 오후에는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한 집에 두 생명이 병원행이라니, 우리 집 터가 안 좋나? 쓸데없는 생각하다가 주차장 기둥에 차 뒷범퍼를 박아버렸다.
진통제를 맞고 비몽사몽하던 반려인의 모습이 마치 어제 회복실에 누워 있던 리아 같았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또 사그러져가는 목소리로 ‘미안해’라고 읊조렸다. 그 말에 내가 더 미안해졌다. 그가 이렇게 혼자 아픈 줄도 모르고, 나는 그를 우선순위에서 제외하고, 또 혼자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앉아 있었다니.
우스운 점은, 반려인의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순간적으로 ‘리아 수술을 괜히 시켰나’ 싶은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 순간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다. 리아 앞에서는 반려인을 원망하더니, 반려인 앞에서는 리아 탓을 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사람은 불행을 만나면 자신의 바닥과 마주하게 되는 것 같다.
흔히 반려동물을 들일 때 주의사항 가운데 하나로 ‘비용’을 이야기한다. 화장실과 스크레쳐 같은 기본 용품값에다가 사료와 모래 등 생활유지비, 각종 예방접종과 아플 때 드는 병원비까지 감당할 여력이 있을 때 데려오라고 조언한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비용’은 돈이라는 물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대를 마음껏 사랑하고, 기쁠 때뿐 아니라 슬플 때마저도 기꺼이 함께하는 마음가짐, 불행에 침몰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건강한 정신상태, 서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용기, 상대의 아픔마저 잘 반려할 수 있는 건강까지 모두 포함하는 게 아닌가 싶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나는 집에 있던 홍삼 한 포를 뜯어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