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바람을 너에게 강요하지 않기
고등학교 같은 반에 동명이인 친구가 있었다. 이름 덕분인지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나중에는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하교하면 그 친구 집에 모여 수다를 떨고, 저녁에 학원도 같이 다녔다. 그 친구를 꽤 좋아했는데, 매사에 솔직하고 어떤 상황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속 깊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정도를 모르고 자꾸만 장난을 쳤다. 대부분의 장난은 친구의 약점을 놀리는 것이었다.
한번은 친구가 크게 화를 냈다. 그 친구는 울면서 내게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해?”
아마 참고 참다가 터진 감정이었을 텐데, 나는 친구가 우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 앞에서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 친구와는 결국 성인이 된 이후 시나브로 연락이 끊겨버렸다. 철이 없던 탓에 좋은 친구 하나를 잃은 것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한 번 실수한 기억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된다면 좋으련만 자꾸만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친구에게 했던 장난을 가장한 괴롭힘을 리아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음을 최근에야 알아챘다.
중성화 이후 순식간에 줄어든 운동량으로 인해 리아는 진작에 ‘비만 고양이’ 판정을 받았다. 의사에게 “5.5킬로그램밖에 안 되는데요”라고 항변했지만, 그는 몸무게의 절대량이 아니라 골격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당시 리아는 제자리에 앉으면 배 때문에 뒷발이 보이지 않았다. 네 다리를 모으고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면 머리는 작고 몸집은 거대해서 흡사 거북선 같았다. 그때마다 리아를 보며 “우리 리아 거북선이야, 아니면 방석이야, 아니면 고양이야?”라고 묻곤 했다. 또 리아가 드러누울 때면 뱃살을 만지며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물었다.
리아의 비만을 걱정했던 이유는 각종 성인병이 우려되어서였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양이도 살이 찌면 신진대사에 무리가 올 테니까. 오래 같이 살아야 되는데 아프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마음이었다.
언젠가 같이 동물을 키우는 동생에게 리아가 자꾸 살이 찐다고 하소연했다. 그 친구 둘째 고양이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던 참이었다. 동생은 내게 “언니, 그 말 리아 앞에서 했어요?”라고 물었다. 그렇다는 내 말에 정색하며 리아 앞에서 그런 말은 꺼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동생은 키우는 고양이들 마음이 궁금해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에게 본인 고양이들 마음을 읽어봐달라고 의뢰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둘째 고양이가 “나는 뚱뚱해서”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을 했단다. “너는 뚱뚱해서”는 동생이 매일같이 둘째 고양이에게 했던 말이란다. 관절염 때문에 높은 곳을 올라가지 못하는 둘째를 볼 때마다 “너는 뚱뚱해서 거기도 못 올라가고 어쩌려고 그래”를 달고 살았다. 그 말을 둘째가 알아듣고 주눅이 든 것 같다고 미안해했다.
'동물의 마음을 읽는다'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리아 앞에서 리아를 비난하지 말라’는 조언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리아가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말투의 뉘앙스와 태도는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내가 주는 스트레스와 긴장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까. 나는 장난으로 건넨 말이라 해도, 리아에게는 다르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동물은 영특해서 사람의 감정을 쉽게 읽는다. 주 양육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본능이기 때문이다. 리아를 임시보호할 때 나는 ‘리아는 곧 제 집 찾아갈 아이’라 생각해 크게 정을 주지 않았다. 당시에 리아가 내 눈치를 얼마나 봤는지 모른다. 부모를 잃고 친척 집을 전전하는 아이가 딱 리아 같았을 것이다. 그런 녀석에게 매일같이 ‘너 뱃살 어떻게 할 거야’라며 놀렸으니, 녀석 속이 얼마나 상했을까.
게다가 ‘리아가 살을 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내 바람일 뿐이다. 나도 모르게 내 바람과 욕심을 리아에게 투영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물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바라는 것을 모두 강요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리아가 나와 살면서 포기하는 것들이 있듯이, 나도 리아와 함께하면서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마음을 달리 먹으니 조금 편안해졌다. 리아가 아픈 지금은, 녀석의 살집이 고마울 따름이다. 병도 체력이 있어야 견뎌낸다. 리아는 구조 당시 범백을 앓았는데, 병마와 싸우다 보니 앞자리가 3이었던 몸무게가 1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고양이 범백은 치사율이 90퍼센트다. 리아는 몸무게가 어느 정도 받쳐주었기에 그 순간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던 것 같다. 이번 병을 앓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병이 진행 중일 때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4킬로그램까지 빠졌다. 리아가 용감하게 병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토록 구박하던 몸무게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