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한 아니고 무한대

끝이 없는 꿈의 대화

by 다시봄

‘기초 자바 입문’

책의 가제라고 했다. 너무 밋밋하고 뻔하고 멋없는 제목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저자에게 제목을 바꿔주고 싶다고 했다. 저자는 흔쾌히 제목 후보를 말해 달라고 했다. 책의 내용을 본 후에 알려주겠다며 그의 책을 들췄다. 글보다는 그림과 사진이 많은 책이었다. 중간쯤을 훑었을 때 난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빨려 들 듯 책 속에 푹 빠졌다. 부록처럼 끼워져 있는 책 속의 책은 환상이었다. 거기엔 그림으로 찍은 영화 한 편이 있었다. 지금껏 그렇게 현실 같은 또렷한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신비한 영상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며 빨려 들 듯 책장을 넘기는 내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그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간신히 마지막 장에서 빠져나와 홀린 듯 책의 제목을 읊었다.


‘최초로 거기에 내가 있었다!’


걸맞은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장 말고는 책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소름 돋는 책의 이미지가 최초로 나를 책만의 세상에 데려다주었기에 꼭 제목으로 써야 한다고 우겼다. 그는 출판사 편집자와 의논해 보겠다고 했지만 흡족해하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책을 극찬하는 독자가 지어준 제목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내 연락처를 물었고 꼭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도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꿈에서 깨자마자 책 제목을 메모하고 덩달아 떠오르는 문구가 있어 적어놨다.


무제한 아니고 무한대


꿈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던 과거의 나는 의식에 갇힌 나였다. 꿈은 내면의 아이, 무의식의 나인데 말이다. 꿈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마냥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고, 꿈을 통해 나를 만나려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고, 꿈으로 태몽을 대신 꿔주는 일이 가능하리라!


제한이 없는 것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한없이 큰 세계가 바로 무의식의 세계가 아닐까? 의식할 수 없기에 미지의 영역이지만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 세계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통로를 열어두려고 한다.


몸으로 느껴지는 어떤 기운이나 건강상태

깨끗이 걸러지지 않고 남아있는 마음의 찌꺼기

누군가의 보기 싫은 말이나 행동, 표정

그리고 꿈속의 낯설지만 익숙한 내 모습




30대 초반, 하고 있는 일에서 도저히 의욕이라곤 찾을 수 없었던 그때, 지인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한다는 한 연구소에 간 적이 있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마음을 위로받고 치유하고자 한다는 게 양심에 찔려 몰래 그곳을 다녔다. 연구소에는 각자의 상처를 안고 온 나 포함 8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명상하는 법을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 명상법이 그때는 나와 대화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눈을 감고 잡념이 사라질 때까지 가부좌를 유지한 채 앉아있다 보면 어느 순간 온갖 색깔들로 어지럽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다가 훅 하고 선명해진다. 선명하다는 건 아무런 색도 형상도 떠오르지 않는 맑은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가 되면 나는 둘로 분리되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나와 그걸 바라보는 또 다른 나로 나뉜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경지’가 되면 거짓말처럼 아무런 걱정이 없어진다.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걱정 가득한 가부좌 인간을 돕고 싶어 진다.


정말 그런 게 가능했던 건지 그것조차도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구소에 다니는 한 달 간은 마음이 편안했다. 비슷한 이유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였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약속한 한 달이 지났고 연구소에서는 각자에게 ‘호’를 붙여줬다. 자신이 원하는 걸 써내면 소장님이 최종 결정을 해줬다. 내가 써낸 호는 ‘소원’이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일주일 전부터 그 단어가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장님은 그걸 ‘초원’으로 바꿔줬고 내게 초원에서 뛰어놀듯 자유롭게 살라고 하셨다. 점 하나로 달라진 호가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고 한동안 스스로를 초원이라 부르고 다녔다.


지금 새삼스럽게 그때를 떠올리는 이유는 당시에는 치유를 위해 그곳을 찾았지만 지금처럼 그때도 내 마음이 궁금했던 게 아닐까 해서다. 굉장한 경험이었고 꽤 오래 나를 편안하게 해 줬으니 덕을 보긴 했다. 하지만 본질을 모르는 편안함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기 마련이다. 나는 다시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고 방황했다.


연구소에서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목적이었고 그 상태가 유지되면 마음의 상처가 별거 아닌 게 된다고 가르쳤지만, 객관화만으로는 허전함이 있었다. 따뜻함이 필요했던 건데 더 차가워져야 했기 때문일까? 단지 바라보게만 할 게 아니라 손잡아주고 안아줬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책을 보고 책 제목을 기꺼이 지어주겠다고 하는 꿈속의 나는 낯설다. 그런 오지랖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꿈을 통해 나는 따뜻함을 느낀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그런 대접을 받을 생각에 따뜻해진다. 결국 또 위로가 필요한 걸까?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필요한 걸까?


꿈이 하는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야 없겠지만 듣고자 하니 계속 꿈을 꾼다. 다른 듯 같은 꿈을. 그래서 꿈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