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희가 알려주는 욕망의 투사
“정아름이 부자가 아니었으면 네가 그렇게 미워했을까?”
심리학과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안 보고 아껴두었던 ‘문제의 화제작’ <나의 해방일지>를 정주행했다. 보는 내내 ‘이 작가 심리학 공부했네. 완전 심리학 드라마네.’하면서 강의를 들을 때보다 더 머릿속에 쏙 박히는 대사와 행동들을 메모했다. 뒤로 갈수록 사랑하는 배우 조승우와 지진희를 합쳐 놓은 것 같은 팔색조 배우 손석구(구씨)에게 빠지기도 했지만 눈여겨 보게 된 인물은 이민기가 연기한 ‘염창희’였다.
창희는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내적 갈등하는 인물이다. 부자가 되고 싶으나 현실은 따라주지 않고, 승진이라도 해서 욕망을 채우고 싶지만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는 동료가 있다. 자신과 다르게 욕망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고 사는 같은 부서의 정아름 대리. 창희는 정아름을 경멸한다. 부자인데도 욕심에 끝이 없는 정아름의 행태가 꼴불견인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으면 포기가 빠를 텐데 아버지가 돈을 쥐고도 자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으니 창희는 그런 아버지도 미워한다. 자기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못마땅하고 슬프다.
그런 창희에게 동료직원이 팩트를 꽂았다.
“정아름이 부자가 아니었으면 네가 그렇게 미워했을까?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여자였으면 네가 그렇게 싫어했을까? 너도 정아름처럼 욕심 있을 수 있는데 없는 척하는 걸 수 있다고. 니 욕심 부정하지 말고 맘껏 펼쳐보라고. 너 부자 되잖아? 정아름 안 미워한다.”
그렇다. 창희는 자신이 부자가 아니어서 불만족스럽고 부자가 되고 싶지만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데다 능력도 부족하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걸 갖고 있는 정아름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것이다. 내 안의 나를 부정한 것이다.
동료의 말을 듣고 부자인 척하고 싶은 욕망의 불씨를 발견한 그는 아주 소소하게 그 불씨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정아름을 미워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티 내기로 한 것이다. 구씨에게 5억짜리 외제차를 빌려 끌고 다니며 지인들에게 맘껏 뽐낸다. 욕망의 굴레에서 해방을 맛보자 거짓말처럼 정아름에 대한 미움이 옅어진다.
소름이 돋았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임팩트 있게 나를 사로잡았던 ‘마음의 진실’을 창희라는 모습으로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고 채우지 못한 욕망 덩어리는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엉뚱하게도 이미 충족된 것처럼 보이는 타인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한때 미워했던 친구가 있다. 술만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어 같이 술 마신 사람이 뒷수습을 해야 하고, 남자 꼬시려고 최대한 야한 옷을 입고 나이트에 가고, 상대에게 불만이 있으면 필터링 없이 다 말하고, 식탁 위에서 식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친구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 못된 버릇을 고칠 생각이 없는 그녀의 견고한 태도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허점과 느슨함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도 당당한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매사 빈틈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이었으니 당연했다.
그 친구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해서 같이 만났다. 사교댄스 동호회에서 살사를 추다 만났다고 했다. 전혀 기대가 안됐다. 그동안 만난 남자들만 봐도 그놈이 그 놈일 거라고 넘겨짚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를 만나 몇 마디 나누자 친구에게 미안해졌다. 친절하고 반듯하고 책임감 있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한편으론 그런 남자가 왜 저런 친구를 만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솔직하잖아요. 자신을 포장하고 사는 가식적인 사람보다는 그녀처럼 있는 그대로를 다 보여주며 살아가는 사람이 좋더라고요.”
그 친구를 미워한 건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고 늘 한 겹 두 겹 포장하기 바쁜 내가 답답했던 걸까? 나와는 완전 다른 인간을 만나니 거부감이 들었을 뿐 친구의 자유로움과 본능에 충실한 삶을 부러워했던 건 아닐까?
여전히 제 멋대로 사는 친구가 썩 맘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저 안에 내가 있다고. 가끔은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은 삶을 그녀가 대신 살아주고 있는 거라고!
누군가가 밉다면 그 사람 안에 내가 없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욕망이 투사되었다는 걸 눈치채면 그를 조금은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게 되니까. 내 안에 그림자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나를 보이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