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제작자, 영화 PD가 되다
숫자로 시작해서 숫자로 끝나는 투자자보다는 감동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
영화 투자자로 살았던 그가 영화 제작자가 된 이유이다.
오랜만에 그에게 연락이 왔다. 아는 동생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데 제작 PD를 하게 됐다면서 시나리오를 읽어봐 달라고 했다. 내 글은 잘 못 써도 남이 쓴 글 비평은 잘하는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기꺼이 읽고 아낌없는 첨언까지 했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는데 촬영 현장에 한 번 놀러 오란다. 한때 영화인으로 산 적이 있는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현장의 분주함과 땀냄새가 그리웠다. 그 날을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만의 설렘인지...
그를 처음 만난 건 드라마 작법수업에서다. 같은 조여서 수업이 끝난 후 술 한잔 하며 글쓰기에 대해, 삶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 많았다. 글을 계속 쓰고 있다면서 자신이 쓴 글은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 그에게 물었었다.
"도대체 글을 쓰긴 쓰는 거예요?"
"지금 읽어야 할 글이 산더미라 아직 못 썼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는 영화 투자를 하기 위해 좋은 글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였다. (투자로 이어진 적 없는 이름만 투자자였지만) 그러니 읽어야 할 글은 많고 그걸 읽느라 글쓰기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일에 집중하지 왜 글을 쓰려고 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명대사였다. 투자자로 있기엔 아까웠다. 읽는 건 다른 사람한테 시키고 글만 쓰라고 하고 싶었다. 결국 그가 쓴 글은 읽어보지 못하고 작법수업이 끝났다. 한동안 연락이 뜸하더니 촬영장 헌팅하고 제작회의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거다.
영화 촬영 현장은 포천에 있었다. 창고같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세트가 지어져 있고, 모니터만 주시하고 있는 감독, 스크립터, 편집감독과 데이터 매니저가 보였다. 야외 촬영이 끝나고 세트 촬영 중인 그곳엔 30명이 넘는 스탭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도 전혀 아랑곳 없는 그들을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듯 관찰했다. PD인 그는 전화받고 무전하느라 내게 인사할 시간조차 없었다. 작은 의자 하나를 내주고 앉아 있으라고 해서 그와 감독 사이에 앉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모니터를 주시하며 감독이 스탭들과 주고 받는 말을 주워듣고 있었다.
"표정 너무 좋은데요? 배우님! 그대로 한 번만 더 갈게요."
한 번만 더 간다고 했지만 한 번이 아니라 컷에 따라 수십 번을 더 갔다. 그럼에도 표정 한 번 굳지 않는 배우와 감독과 스탭들과 PD. '스탠바이 큐'를 외칠 때마다 긴장하고 감탄하고 즐거워하는 표정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받침 없는 의자에 앉아 허리가 아파 죽겠는데 그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세트장 안에 있어 보이지 않는 촬영, 조명, 녹음감독님을 제외하고는 스탭들 모두 20-30대 초반의 젊은 층이었다. 스크립터로 일했을 때 나도 20대였으니까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오전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와 대화할 시간이 생겼다. 총 제작비의 20분의 1 정도 지원을 받고 제작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궁금한 게 많았다. 단편영화로 데뷔하는 신입 감독이야 돈 한 푼 못 받고 일한다고 해도 30명이 넘는 스탭(야외촬영 때는 100여명의 스탭이 있었다고 한다)과 배우의 개런티는 어떻게 충당하는지 알고 싶었다. 대놓고 돈 얘기 먼저 하지 않고 그들이 누구인지 먼저 물어봤다.
"촬영감독은 스0, 조명감독은 도0, 녹음감독은 오0에 참여한 분들이야.”
“네? 오0요? 그렇게 유명한 감독님이었어요?”
“아까 본 편집감독은 상업영화 웬만한 건 다 편집하셨을걸? 주차장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성우들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유0에 참여한 성우야."
"그런 분들이 왜... 설마 재능기부?"
"그런 셈이지. 성우들은 후시 녹음해도 되는데 굳이 동시 녹음하겠다고 여길 왔다니까. 배우도 노 개런티고."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계적인 배우를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저 괜찮을까요?"
놀라웠다. 아니 이해가 안 됐다. 그 정도 스펙이면 부르는 게 몸값일텐데 이름도 없는 신입감독의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 모였다니... 그들의 무엇이 현장을 찾게 한 걸까? 그에 대한 해답을 영화 제작자인 그가 대신 해줬다.
그건 내 영화니까! 영화를, 이야기를 만드는 건 감동을 만드는 일이잖아!
이야기를 만드는 건 작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완성해가는 과정에 수많은 스탭들이 관여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체득하지는 못했었나보다. 그들은 모두 영화에 참여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역할이 크지 않아도, 숟가락 하나 얹었다 해도 그곳에 있었다면 그 영화는 그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걸 알기에 열정이 있는 것이다.
뒤늦게 영화제작자가 되어 어설프기도 하고 아마 (제작비 면에서) 손해도 엄청나겠지만 감동적인 현장에 있는 그가 부럽고 멋있었다. 그가 말하는 감동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 다시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