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사랑이었을까?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늘 그랬듯 미사 후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갔다. 메뉴라곤 바닐라라떼밖에 없는 것처럼 그날도 바닐라라떼를 마시는 아빠. 집에 오는 길에 화원에 들러 꽃 화분을 사고, 꽃집 사장님이 무료 나눔 해 준 명자나무를 집 앞 정원에 심었다. 아빠는 명자나무가 잘 자리 잡을 수 있게 삽으로 땅을 깊이 파고 지지대까지 세워 새로운 식구를 맞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가 삶은 고기였던 것 같은데 평소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그날은 10분 만에 식사를 끝내고는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며 타이레놀 2알을 삼키곤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잠시 후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고기에 술까지 마시며 즐겁게 웃고 떠들던 우리는 깜짝 놀라 안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새우처럼 등을 굽혀 누운 아빠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신음 소리를 냈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통증 호소는 우리는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컨디션이 좋아 보였던 아빠였는데 갑자기 아파하며 누워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어디가 아파? 왜 그래 여보?”
엄마는 놀라서 아빠를 돌아 눕혔다.
“숨이 안 쉬어져.”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진다는 아빠의 말에 일동 정적. 술을 안 마신 사람은 작은 형부뿐이어서 작은 형부가 운전하고 오빠가 동석하여 아빠를 응급실에 모셔갔다. 1시간 후 연락이 왔다. 급성 폐렴으로 입원해야 한다고. 그렇게 아빠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 남매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젊은 아빠는 늘 술에 젖어 우리를 훈계했고 엄마를 때렸고 집안 살림을 부쉈다. 아빠의 삶이 어떠했든 어릴 적 아빠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은 술 취한 아빠를 피해 도망 다니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4남매 모두 아니 적어도 나에겐 아빠를 좋아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말이 없는 아빠가 술만 마시면 밤새 우리를 붙잡고 잠을 안 재웠으니 무섭고 짜증 나고 피하고만 싶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주장이 늘 옳기에 상대방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아빠가 싫었다. 겸손하지 않은 오만한 태도, 무뚝뚝함을 기본 장착한 아빠가 밥 먹을 때 숟가락을 쪽쪽 빠는 것도, 반찬을 휘적이는 것도, 밥 먹고 이쑤시개로 양치하듯 이 사이사이를 들쑤시는 것도 보기 싫었다.
그 후 40년이 지났는데도 어릴 적 아빠에 대한 나쁜 기억은 우리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어, 아빠의 소소한 습관을 마주할 때면 인상을 찌푸리곤 한다. 평소엔 말이 없는 아빠여서 살갑게 대하기도 무안하고 대화하기 편한 상대도 아니어서 할 말이 있어도 엄마를 통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게 대면대면하며 계신 듯 안 계신 듯하게 여기던 아빠인데 병원에 누워 약에 취해 잠만 자는 모습을 보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하루종일 누워있다가 밥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앉아 있는 아빠도, 기운이 딸려 떨리는 손으로 쥔 숟가락을 입에 제대로 넣지 못하는 아빠도, 평소 같으면 버럭 화를 냈을 텐데 간병인의 불편한 요구에도 동요하지 않는 힘없는 아빠가 낯설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폐렴 수치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올라갔고 그럴수록 항생제의 강도가 세졌고 아빠의 몸집은 급속도로 작아졌다. 급기야 약에 취해 잠만 자느라 눈 뜬 아빠를 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누워 있는 아빠를 보는 동안엔 미웠던 아빠는 사라지고 불쌍하고 가여웠던 어린 아빠만 생각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나이 많은 큰형에게서 자라 사랑받지 못한 아이로 큰 아빠는 가출을 반복하다가 월남전에 참전했다. 두 번의 월남전을 치르고 큰돈을 벌었지만 그 돈은 모두 형들에게로 갔고 상처로 가득한 그때 엄마를 만나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며 사 남매를 키웠다고 했다. 몸에 밴 애정결핍은 결국 알코올에 의존한 폭력으로 나타났고 그 속에서 아빠도 우리 가족도 모두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받았다. 나이가 들면서 뜻하지 않은 병환으로 누우실 때마다 불우한 과거는 아빠를 이해하고 보듬는 도구가 됐지만 이번엔 유독 그 도구가 실력을 발휘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시절의 돌이킬 수 없는 여러 폭력적인 상황들을 견뎌야 했던 아빠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지…
병원에 입원한 지 열흘이 되었을 때 신부님으로부터 병자성사를 받는 아빠의 떨리는 손과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울부짖듯 내뱉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왈칵 울음이 터졌다.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열 명쯤 모여있는 작은 공간에서 나만 혼자 통곡하듯 울었다. 병자를 치유하러 오신 신부님의 마지막 말 한마디는 또 한 번 울음보를 건드렸다.
“그동안 가족들에게 미안했던 게 있다면 지금 용서를 빌고 그들에게 서운한 게 있다면 지금 다 용서하세요!”
아빠는 용서한다고 대답했다. 나도 그러겠다고 마음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잠시나마 서로를 용서했다.
아빠가 누워계신 동안 40년 묵은 증오가 조금씩 해소되는 걸 느꼈다. 아픈 아빠가 고통 속에서 사경을 헤맬수록 나는 쌓였던 감정을 더 많이 덜어냈다. 아빠에 대한 미움보다 아빠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걸까? 아빠가 하지 말았으면 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아빠를 미워했던 것도, 그것도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 행동만 아니면 ‘아빠를 사랑해요’라는 일종의 고백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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