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터를 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아빠가 무서웠다.
평소 말이 없는 아빠는 술만 마시면 밤새 얘기를 하셨고 밤새 집안의 가구에 주먹질을 했다. 안방 나무문에는 아빠의 주먹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언니들과 함께 방을 쓰던 어린 나는 소리로만 아빠의 주사를 들었지만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온 날 아빠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엄마는 우리 네 남매를 근처 큰 외숙모 집으로 피신시켰다. 큰언니를 필두로 오빠, 작은언니, 나까지 넷이 창문을 넘어 아빠로부터 도망을 갔다.
피신하는 날이면 자다 깨어 비몽사몽이다가도 큰 난관 앞에서 정신이 번쩍 났다. 난관은 바로 창문 앞 도랑이다. 창문을 넘는 건 몇 번의 경험으로 익숙해졌지만 도랑을 넘는 건 쉽지 않았다. 나중에 커서 보니 그 도랑의 너비는 1미터도 안됐다. 그런데도 어린 나에게 그곳은 하천만큼이나 넓고 깊게 느껴졌다.
무섭다며 안 건너겠다는 걸 언니들이 간신히 얼르고 달래서 도랑을 건넜다. 건너고 나서는 언제 울었냐는 듯 전속력을 내어 외숙모 집으로 뛰어갔다. 언니들보다 먼저 도착하는 게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기억 속의 아빠는 도랑 같은 사람이다.
그 앞에 서면 무섭고 두려운 존재. 건너기보다는 피하고 싶은 존재.
그래서일까? 막내인 나를 크게 혼낸 적이 없는데도 아빠가 무서웠다. 아빠 다리는 늘 내 자리였고 한 번도 뺏기지 않았다고 했다. 교통편이 불편한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를 매일 등교시켜준 것도 아빠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지원해 준 아빠인데… 사랑을 받기만 했지 주지를 못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날, 아빠가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3년 전 처음 뇌경색이 발병했을 때 가족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자주 안부를 물었고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아빠도 술과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며 건강한 삶을 사셨다. 모두가 그날을 잊을 만 해지자 재발한 것이다. 두 번째 뇌경색은 약하게 왔지만 늘 조심해야 하는 상황임에는 변함없었다.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병실에 혼자 계실 아빠를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입원실 내에서도 커튼을 치고 옆 사람과 대화도 해서는 안 되는 열악한 상황이라고 했다. 티비도 없고 대화도 할 수 없는 감옥 같은 곳이라고…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다치실까 가슴이 쓰리다.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좋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아빠와의 전화통화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매끄럽지 않은 대화. 긴 침묵. 매일 전화를 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통화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진다.
차라리 도랑 속에 빠졌어야 했나? 빠져서 같이 허우적댔어야 ‘미지’라는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도랑 같은 아빠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돈 때문에 월남전을 두 번이나 갔다 온 아빠다. 전쟁터에 다녀온 게 훈장이 되어 그 힘으로 사셨으니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을 거다. 아빠는 그렇게 자신을 철저히 감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억압의 스트레스를 술기운을 빌어 풀었던 것뿐인데, 어린 나는 도랑을 건너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살았다는 이유로 평생 아빠를 미워하게 된 것이다.
언제쯤 아빠와 나의 거리가 1미터 안쪽이 될 수 있을까?
예방차원에서 뇌혈관 확장 시술을 하게 됐다. 심혈관도 연결되어 있어 그곳에도 시술을 한다고 한다. 간단한 시술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위험한 두 곳을 건드리는 일이어선지 아빠가 긴장을 하셨다.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긴장 탓에 혈압도 170 이상이 나온다고 했다.
아빠가 그렇다고 하니 하루에 한 번의 통화로도 걱정이 가시질 않는다. 아빠와의 대화가 불편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나중에 도랑에 빠져 허우적대더라도 제발 지금은 아무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