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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May 25.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8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8 산티아고 북쪽길로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목이 많이 좋아졌다. 붓기는 다 가라앉았고 더이상 절뚝이며 걷지 않는다. 어제 해안가를 따라 걷다가 순례자길 노란 화살표를 발견했다. 그리고 순례자 표식인 조개를 매단 큰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 몇몇 사람들을 봤다. 앗, 이곳에도 순례자길이 연결되어 있는 건가. 정보를 찾아보니, 이곳 산세바스티안이 순례자길 중, 북쪽길 (Camino de Norte)의 한 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쪽길은 순례자길의 네가지 길 중 스페인 북쪽 해안길을 따라 걷는 길로, 바다와 숲을 고루 볼 수 있는 길이다.  팜플로나에서 버스를 타고 빌바오로 올라올 때에는, 빌바오와 산세바스티안에서 며칠 쉬다가 다시 팜플로나로 돌아가서 프랑스길을 계속해서 걸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순례자 길이 있는데 굳이 왔던 곳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내륙의 기온은 여전히 40도를 웃도는 날씨. 이 북쪽길은 해안가를 따라 걷는 길이라 기온도 십도 정도 낮고 바람도 서늘하게 불어 걷기에 훨씬 좋은 날씨고, 자연 경관도 내륙의 길과는 다르다.  


어제 묵은 펜션은 오늘 비워줘야 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축제기간이라 이미 예약이 다 차 있었다. 산세바스티안 순례자 숙소로 찾아가 하루를 더 묵으면서 프랑스길로 돌아갈지, 아니면 여기서부터 북쪽길을 따라 순례를 계속할 것인지 생각해봐야겠다. 순례자 숙소에 가면 이런저런 정보도 더 얻을 수 있겠지. 산세바스티안 순례자 숙소 주소와 대략의 위치만 파악하고 펜션을 나섰다. 


발길 닿는대로 다니는 것이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디를 갈건지, 얼마나 머물건지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기 마련이다. 순례자길 중 프랑스길을 따라 걸으려던 계획이 바뀌었다. 발목이 아팠고, 하비르를 만났고, 하비르가 추천한 빌바오와 산세바스티안을 찾아왔고, 이곳에 있는 또다른 순례자길을 발견했다. 물론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낯선 곳을 찾아온 여행길에서도 내가 처음 세운 계획대로 하고자 하는 관성이 작용한다. 인생을 살아온 습관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팜플로나로 돌아가서 걷던 길을 계속 걸아가는 것과 이곳에서 시작되는, 계획하지 않았던 북쪽길을 따라 걷는 것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런데 원래 계획했던 그 길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다. 그저 미리 계획을 했을 뿐이고,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정도가 이 곳에서 발견한 북쪽길과 다른 점이다. 


누구나 생각을 해본 쪽으로 행동하는 것에 덜 불안해 한다. 그것이 똑같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사고가 행동을 제한해서 범하는 오류다. 계획한 길, 다수가 가는 길, 좀 더 알고 있는 길로 가려는 것이, 위험을 피하고자하는 인간의 본성상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이 더 낫거나, 덜 위험한 길이란 보장은 없다. 중요한 건, 그 어떤 길도 나는 경험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생각의 힘으로 행동을 이끌어 목표한 무언가를 이룰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제한된 생각으로 인해 더 큰 경험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기도 한다. 내 생각과 사고에 빠져 ‘생각해 본’ 길로만 가려는 습관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전공이나, 여러 가지 직업 중에 무엇이 잘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고민한다. 하지만 그 확신이란 해보지 않고선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익숙한 것, 더 많이 접해본 것으로부터 벗어나길 두려워한다. 그래서 불만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새로운 공부를 해보거나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 점점 더 어렵고 두려워지는 것이다. 계획한 것,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이 필요하다. 과거와 지금 이 순간 외엔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다. 정해진 길이라고 해서 그 길이 더 안전한 길은 아니다. 다수가 간다고 해서 그 길이 더 나은 길도 아니다. 생각한대로만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불확실성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선택해서 맞딱뜨려 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선택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불확실함이 아닌, 내가 현재 맞딱드리는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북쪽길을 따라 걷는 것이 더 불확실하다고 느껴지지만, 어차피 내겐 다 낯선 길이다. 숙소나 여정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가지고 있다고 해서 더 좋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프랑스길을 일주일쯤 걷고 올라온 이곳 스페인 북부 지방의 한 도시. 계획하지 않았던 길을 선택함으로써 난 프랑스길을 걷고 있을 하비르나 마고가 겪지 못할 또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더 안전하고 편한 길은 없다. 그저 다른 길이 존재할 뿐이다.


해안길에서 본 노란 화살표를 따라 해안가 뒷편 산을 올랐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오니, 산을 타지 않고도 찾을 수 있었던 가까운 곳에 순례자 숙소가 위치해 있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이라서 구시가지 내에서 숙소를 구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렵게 찾아온 이곳 순례자 숙소에 다행히 침대가 남아 있었다. 삼사십명쯤 묵을 수 있는 곳으로, 기부제로 운영되고 있다. 숙소 입구에서 연로한 할아버지 한분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접수를 마치고 가장 구석에 있는 침대를 골라 짐을 풀었다. 시에스타가 끝나갈 시간, 해는 여전히 강렬하게 내리쪼이고 있다. 발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관광객 모드로 미술관과 도시 구경도 다니며 푹 쉬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순례자 모드로의 복귀다. 떠나기 전에 이 아름다운 해안도시의 모래사장을 밟아보기라도 해야겠다.

짐을 부려놓고, 숙소 앞 모래사장으로 향한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바닷가, 나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오랫만의 일광욕이다. 비키니 수영복이라도 가져왔으면 좋으련만, 내 큰 배낭에 수영복을 넣을 자리는 없다. 일광욕을 즐기는 여성들 중에 비키니 브라를 안하고 누워있는 여성들이 많다. 누드 비치는 아닌거 같은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벗는다. 유럽의 바닷가에서 상의 누드는 흔히 볼 수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보다. 일주일 스페인 태양에 타버린 구릿빛의 내 팔다리, 옷에 가려진 몸통은 하얗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보드라운 모래 위에 누워 책을 읽고 있자니, 행복감이 밀려온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맨몸으로 맞고 싶은 강한 욕구가 치민다. 민소매 셔츠를 벗고 브라를 벗어던진다. 그리고 엎드려 책을 읽는다. 배와 가슴에 느껴지는 모래 감촉과 등을 간지르는 뜨거운 햇살과 바람. 자연과 내 몸이 밀착된 느낌. 자유롭다. 아무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좋을 수가. 아 이래서 사람들이 벗는구나!


형식과 내용이 상호 규정하듯이, 외부적 자극이 나의 사고를 변화시킨다. 거리낌 없어서 누드 (상반신 뿐이지만!) 가 된 것이 아니고, 누드가 되고 보니 거리낌이 없다. 너무 많은 생각에 갇혀 있을 때, 생각이 변하기를 기다리기보다 행동을 바꾸면 생각이 변화하기도 한다. 우리는 점점 더 행동보다 사고를 먼저 하도록 길들여진다.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 한번 낙오하면 끝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보니 치밀한 계획 아래 빈틈없이 살아가는 것이 선(善)이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리만 커져간다. 팔과 다리, 온몸을 움직여 행동하는 것. 그것은 깊이 있는 생각이나 결단력만큼이나 나라는 존재를 규정한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한 행동이, 생각이나 말보다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속옷 자국없이 한시간쯤 태우고 나니, 고르게 구릿빛이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이 아닌, 나도 이 곳의 일부가 된듯 편안해졌다. 발길닿는대로 찾아온 산세바스티안, 즉흥적으로 된 상반신 누드. 이 순간, 이곳이 아니었다면 절대 느껴볼 수 없었을 기분을 만끽한다. 계획대로 되는 건 없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기에 더 많은 감정을, 더 많은 세상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 - 그것이 여행이고, 또 그것이 삶이다.


Distance: 산세바스티안 구시가지에서 순례자 숙소까지 
Time for walking:  10:00 pm – 3:00 pm
Stay: 산세바스티안 순례자 숙소 
A thing to throw away: 꽤 묵직한 선글라스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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