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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May 25.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7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7 축제의 도시, 산세바스티안


아름답고 평화로운 빌바오에서 하루를 더 묵을까 하다가, 하비르가 꼭 가보라고 일러준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으로 향하기로 했다. 빌바오에서 버스로 한시간이면 도착하는 곳이니 금새 둘러보고 돌아가도 되고, 마음에 드는 곳이면 좀 더 머물면서 발목이 완전히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 어제 무리하지 않아서인지 발목의 붓기는 많이 가라앉았다. 


빌바오의 북동쪽에 위치한 산세바스티안은 버스로 한시간 거리에 위치한 해안 도시다. 바스크 지역에 속해 있으며, 바스크어로는 도노스티아(Donostia)라 불린다. 스페인에서도 가장 유명한 휴양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며,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가 성대하게 열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인구 20만명 정도의 중소도시지만,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서 스페인과 바스크 문화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빌바오에서 버스를 타고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시에스타라 그런지 거리는 매우 한산하다. 버스터미널에서 20-30분 구시가지 쪽으로 걸아가면 관광안내소가 나온다. 관광안내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고, 서너명의 안내원은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숙소와 둘러볼 곳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삼십분쯤 기다린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피에스타(Fiesta – 스페인의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전통적인 축제)라는 것. 성마리아 축일인 8월 15일 전후로 스페인 전역은 축제로 들썩인다. 특히 바스크 지방은 동쪽 도시에서 서쪽 도시로 옮겨가며 그 축제를 이어가는데, 그 축제의 시작이 바로 이 곳 산세바스티안이라는 것이다. 그 축제를 즐기기 위해 스페인 다른 지방에서는 물론, 가까운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왔는데 마침 축제 기간이라니 운이 좋구나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안내원 말에 따르면 근처 호텔이나, 펜션, 호스텔은 이미 예약이 거의 다 찬 상태라 숙소 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거란다. 안내원이 건네준 정보지에 나와있는 숙소만도 수백개는 되어 보이는데, 그 중에 내가 머물 방 하나 없겠나라는 생각으로 관광 안내소를 나왔다. 하지만 막상 숙소를 찾을라니 이 책자 하나만 가지고는 너무 막막하다. 어제 온라인으로 미리 호텔을 예약하려 했지만, 중저가 호텔은 빈 방이 없었고, 방이 남아 있는 호텔은 너무 비싸거나 도시 중심부에서 멀었다. 축제기간 동안 매일밤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길거리에서는 무료 연주회와 콘서트가 열리고, 해변가에 간이 놀이공원까지 세워진다고 하니 이번주 내내 이 도시는 거대한 행사장이 되어 들썩들썩하리라. 어쨌든 숙소를 먼저 구해야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축제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텐데 걱정이 앞선다.


무작정 둘러보는 수밖에 없다. 시에스타가 끝나자 길거리가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관광안내소 바로 뒷골목부터가 구시가지로, 오래된 교회와 집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호텔과 펜션 사인이 보인다. 간판이 크지 않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야 한다. 호텔보다는 펜션 (Pension)이 더 많다. 이곳에서 펜션이라 불리는 숙소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집을 통째로 빌려주는 펜션과는 다르다. 호텔식 개인방에 욕실과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으로, 호텔보다는 저렴하고 호스텔보다는 조금 비싼 가격에 묵을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집에 남는 방을 가지고 운영하기도 하므로 시설이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의 호텔이나 펜션 건물 입구에 ‘completo’라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다. 이미 방이 다 찼다는 말. 그렇게 적혀 있지 않은 호텔이나 펜션 건물의 초인종을 눌러 방이 있냐고 물으니 역시나 ‘컴플리토’란다. 오늘 숙소 구하는게 만만치 않겠다. 이미 구시가지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골목골목마다 타파스(Tapas) 집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른 오후부터 맥주를 마신다. 


대여섯 곳을 두들겨 봤지만 방이 없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또다른 건물의 벨을 누르고 방이 있냐고 물었더니, 올라오라는 대답과 함께 문이 삑하고 열린다. 오호, 방이 있나 보다. 오래되어 삐꺽거리는 나선형의 묵직한 나무 계단을 따라 삼층으로 올라가니, 화장을 곱게 한 얼굴에 금빛 단발머리, 녹색 양장을 예쁘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분이 서 계신다. 방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방이 있긴한데 다른 사람과 함께 써야한다며 내 손을 잡고 그 방 앞으로 데리고 간다. 문을 여니 퀸사이즈 침대 두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창가 침대에는 한 커플이 앉아서 짐을 정리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저희도 지금 막 들어왔어요. 두시간을 찾아 다녔는데 방이 없더라구요.’

‘네 저도 한참을 돌아다녔어요. 방 있다는 곳이 여기가 처음이에요.’

‘저희는 스웨덴에서 왔어요. 자동차 여행 중인데, 축제기간인지 모르고 왔거든요. 방이 이렇게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조금 비싸지만, 다른 곳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있기로 했어요.’

‘그러게요. 더 찾아봐도 숙소가 없을 것 같긴 해요. ’

‘오늘 여기서 묵고 내일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계획이면, 저희 차로 같이 갈래요? 저희는 발길 닿는대로 다니고 있어서 어디든 상관없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있겠다고 하면, 75유로를 내고 그들과 함께 한 방에서 두개의 침대를 하나씩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욕실과 화장실은 공동 사용. 수백년전에 지어진 건물 구석에 위치한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긴 했지만, 오래된 돌건물에서 나는 습한 냄새가 낮게 깔려있고, 햇볕도 잘 들지 않으며, 에어콘도 없는 더운 방이었다. 나는 까다롭게 방을 고르지 않는다. 10-20유로짜리 순례자 공용 숙소에서도 잘 잔다. 몸 뉘울 침대 하나면 충분하다. 근데 이렇게 작은 공간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과 함께 방을 쓰는 건 영 내키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상냥하고 매너좋은 커플이지만, 꽤 비싼 가격에 그렇게 불편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건물을 나섰다. 여러 곳을 더 두들겨 봤으나 역시 방은 없다. 이미 6시가 넘었다. 점점 불안해진다. 이러다가 길에서 밤을 지새야 하는건 아닐런지.


한두곳만 더 가보자는 마음으로, 구시가지 한복판 또다른 펜션의 벨을 누르니 금발에 헐리웃 배우같이 잘 생겼지만, 느끼하지 않은 순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나온다. 방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이다! 근데 침대가 3개나 있고, 혼자 쓰더라도 100유로라고 한다. 혼자쓰기엔 너무 크고 비싸다고 했더니, 다른 건물에 본인이 운영하는 또다른  펜션이 있는데 그곳에 좀 더 저렴한 방이 있다는 것이다. 그를 따라 구시가지 작은 광장을 가로질러 두어블럭 가니 큰 교회가 나오고 그 교회 바로 맞은편 오래된 건물에 펜션 사인이 붙어 있다. 묵직한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3층까지 올라가니 널찍한 방이 나오고, 누군가 살고 있는 것처럼 갖가지 가구며, 부엌살림이 잘 갖춰져 있는 원룸같은 방이다. 3층까지 올라오는 계단이 좁고 가팔라서 좀 더 싸다며 85유로라고 한다. 비수기라면 20-30유로 싸게 줄 수 있지만, 축제 기간이라 그 가격에 밖에 줄 수 없다며 미안해 한다. 오늘은 더 돌아다녀봤자 이 가격에 이런 방을 구할 수도 없고, 더 싼 방을 찾는다 해도 길에서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내야할지 알 수 없다. 돈과 시간, 지금 내겐 시간이 더 중요하다.  


여행할 때 돈과 시간 둘다 중요하다. 인생살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때때로 시간은 무한정하게 느껴져서, 돈처럼 값어치가 매겨지 있지 않아서, 돈만큼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불현듯 깨닫는다. 시간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한 시간 이 도시를 좀 더 둘러보고, 이 흥겨운 축제를 감상하는 것에 50유로를 써야한다면, 그건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다. 하지만 살면서 많은 선택은 시간보다 돈에 맞춰서 내려진다. 여행은 돈보다 시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을 일러준다. ‘더’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추를 가운데로 옮겨다 놓는다.

구시가지 내에 높다랗게 세워져 있는 교회 앞 오래된 건물 3층 널찍하고 깔끔한 방. 커다란 창문을 여니 15세기에 지어진 장엄한 교회가 보이고, 창문 아래로 북적이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다. 축제기간에 찾아온 산세바스티안. 널찍하고 편안한 방에 누워 축제 전야의 흥겨운 소리를 들으니 나도 야릇한 흥분에 빠져든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적어도 그 스웨덴 커플보다는. 짐을 적당히 풀어놓고, 길을 나선다. 흥겨운 축제 분위기에 피곤함이 사라진다. 축제와는 거리가 먼 순례자길. 큰 등짐을 메고 걷는 고달픈 길이다. 잠시 외길로 빠져 혼자 즐기는 이 축제가 무척이나 낯설지만, 정겹다. 마을 잔치처럼 골목골목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고 술을 마시며 길거리 연주에 맞춰 춤을 춘다. 


성 마리아 축일는 카톨릭에서는 매우 큰 축제다. 매년 8월 15일 전후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큰 축제를 벌인다. 특히 스페인 여러 도시에서 성대하게 치러지는 축제는 널리 알려져 있어 이맘때가 되면 주변 여러 나라에서 찾아오는 인파가 상당하다. 그 중 산세바스티안은 가장 유명한 곳이다. 산과 바다를 품은 도시. 마리아상이 정상에 세워져 있는 산에 오르면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해변을 따라 펼쳐지는 모래사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광욕과 물놀이를 즐긴다.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이 이곳에도 예외는 아니지만, 푸른 바닷바람과 태양의 붉은 기운이 칵테일처럼 섞여 완벽한 날씨를 선사한다. 


구시가지의 먹자골목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자 입이 즐거운 곳이다. 바스크 지역하면 삔초 (Pincho, 이쑤시개)라고 불리기도 하는 타파스 (Tapas)가 유명하다. 크고 작은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음식을, 이쑤시개로 먹을 수 있을만큼 자그마한 사이즈로 만들어 카운터 위에 쭉 올려놓는다. 손님들은 입맛대로 골라 맥주나 와인, 또는 칵테일과 함께 먹는데, 워낙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뷔페처럼 펼쳐져 있어서 어떤 것을 먹어야할지 고민된다.저녁을 9-10시 경에 먹는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 시간 전에 에피타이저로 먹거나, 간단한 점심식사로도 즐겨 먹는다. 축제기간이라 먹자골목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카운터 앞에 꽉 매워선 사람들 때문에 음식을 고르고 주문하는 게 만만치 않다. 카운터 앞에 놓인 스툴에 앉아서 먹기도 하지만, 그냥 서서 먹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이 붐비는 곳에 들어서서 나도 몇가지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르켜서 주문한다. 


작은 바게뜨 빵조각에 얹어진 다양한 음식들, 치즈, 하몽, 야채샐러드, 그리고 갖가지 튀긴 음식들. 멸치, 오징어, 문어 등 여러 해산물로 만들어진 요리들. 올리브, 작은 오이 절임 등 색색깔의 맛있는 음식 구경에 눈이 절로 즐거워진다. 앉을 자리도 없어서 창가 구석에 서서 맥주 한잔과 ‘뽈뽀’라는, 문어를 매콤하게 양념한 요리를 시켜 먹는다. 부드럽게 삶아진 문어에 고춧가루, 올리브유, 소금으로 간을 해 두세 조각을 이쑤시개에 꽂아놓은 음식인데, 매콤해서 한국사람 입맛이 잘 맞는다. 이렇게 한두접시와 맥주 한잔이면 기분좋게 적당히 배를 채울 수 있다. 다시 길거리로 나와 구경하다가 배가 고프면 다른 바에 들러 한두접시에 와인한잔, 그렇게 먹고 또 걷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다. 

알딸딸해진 기분으로 바를 나와서 사람 구경을 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거리로 나와 축제를 즐긴다.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멋을 낸 모습들이다. 아니 그들에게는 일상의 모습일 것이다. 

특히 멋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다. 탱크탑을 입은 할머니, 갈색 구두에 멋진 정장을 차려입은 할아버지, 연두색 원피스에 하얀 구두를 신은 할머니,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와인을 마시는 할머니까지. 10시가 넘었지만, 시가지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하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지금부터가 진짜 저녁시간인거다. 새벽1-2시까지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어린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늦게까지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흥청망청이라기보다는 매우 자유롭게 축제를, 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80세쯤 되어보이는 할아버지 두분의 훌륭한 아코디언 연주, 시멘트 바닥 위에서 비보잉하는 젊은이들, 작은 기타를 켜는 거리의 악사, 개를 데리고 다니며 손수 만든 악세서리를 파는 젊은 아가씨, 알록달록 과일을 파는 노점상, 해지는 바닷가 앞에서 벌어지는 야시장과 갖가지 놀이기구들. 


수많은 놀거리와 볼거리, 어깨가 닿지 않고서는 걸어다닐 수 없을만큼 붐비는 이 도시의 축제, 나도 모르게 취한다. 이 분위기에, 그리고 두잔의 맥주와 한잔의 모히토에. 


Distance: 산세바스티안 구시가지 구경 
Time for walking:  2:00 pm – 11 pm
Stay: 펜션 
A thing to throw away: 우비 (순례길을 떠난 이후로 한번도 입은 적이 없다. 한동안 비가 내릴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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