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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May 25.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6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6 빌바오로 향하다


어제 팜플로나 순례자 숙소에 도착한 후로 내 발목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하비르의 걸음 속도에 맞춰 쉬지 않고 걷느라 더 심해진 것 같다. 기온은 여전히 40도를 웃돌고, 한동안 그럴거라는 예보다. 발목도 많이 아프고, 날씨도 미친듯이 덥다. 


오후 내내 고민했다. 이 상태로 계속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발이 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발에 무리가 가거나, 도저히 걷기가 힘든 상황이 되면 그만두리라 맘 먹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단순한 오기에서가 아니라, 내 몸이 적응하는데 일정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조금 아플 수도 있을 거란 생각, 그리고 어제 새벽같이 일어나 걸었던 그 상쾌함, 작열하는 태양 아래 펼쳐지는 산과 하늘, 아름다운 마을들을 좀 더 보고 싶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하비르가 다가온다.


‘발목은 좀 어때요?’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요. 이 상태로 계속 걸어야할지, 아니면 이곳에서 며칠 쉬면서 발목이 회복되길 기다려야할지 고민되네요.’

‘무리해서 걷기보다 좀 쉬었다 걷는게 낫지 않을까요? 이제 순례자길 초반인데, 벌써부터 발이 많이 아프면 나중에 계속 걷기 어려울 거에요. 나도 몇해 전에 무릎이 아픈데도 일이주 쉬지 않고 걸었더니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더라구요. 아직까지도 무릎이 종종 아파온답니다.’

‘그러게요. 아무래도 이삼일 쉬었다가 걸어야할 것 같네요. 순례자 숙소에서는 하루 이상 묵을 수 없으니, 며칠 묵을 숙소부터 구해야겠어요.’

‘팜플로나에만 있을 건가요? 근처에 가볼만한 도시들이 꽤 있어요. 여기서 버스로 한두시간 거리에 있는 빌바오(Bilbao)와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도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구요.’


말로만 듣던,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빌바오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말에, 여기까지 온 김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삼일 쉬었다 가려던 참이었으니, 빌바오든 팜플로나든 상관없을 터. 


팜플로나 버스터미널, 난 지금 빌바오로 가는 버스 안이다. 그렇게 나의 일정은 변경되었다. 꼭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갈 필요는 없다. 잠시 경로를 벗어난다고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도 아니다. 조금 돌아가거나,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거쳐 갈 뿐이다. 버스로 두시간을 달려 도착한 빌바오. 스페인 북쪽 해안가에 가까운 도시라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기온은 팜플로나와 10도 정도 차이가 난다. 태양은 여전히 강렬하지만, 바다의 기운을 머금어서인지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제 예약해 놓은 호텔을 찾아가 짐을 풀고, 슬슬 미술관을 가볼 참이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임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라 그런지 지하철이나 트램 등의 대중 교통도 잘 갖춰져 있고, 두세시간 걸어서 둘러보기에도 적당한 사이즈의 도시다. 별 계획없이 찾아온 빌바오. 스페인은 어느 도시를 가든 대부분 관광 안내소가 있다. 일요일에도 문을 열고, 영어가 가능한 직원들이 친절하게 관광 명소를 안내해 주고, 숙소를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그래서 스페인의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 현지 직원의 안내를 받는 것이 좋다. 

빌바오는 바스크 (Basque) 지역의 중심도시다. 바스크 지방은 스페인의 자치구역으로서, 고유한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인 바스크인들은 오랜 외세의 지배를 받았지만 1979년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지역의 인구는 3백만명 정도다. 팜플로나에 들어서면서 본, 집집마다 걸려있는 바스크 국기를 보고 하비르가 해준 이야기들이다. 한 국가 안에서 또다른 민족이 그들의 독립을 주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역이라니 흥미롭다. 그래서 이 지역에 들어서면, 지명 이름도 스페인어와 바스크어 두개로 각각 적혀 있다. 팜플로나는 스페인어, 이루나는 바스크어, 이런 식으로.


타이타늄으로 만들어진 구겐하임 미술관의 외관은 그 명성대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강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변 경관과의 어우러짐만으로도 아름답다. 엘에이의 디즈니 콘서트 홀을 건축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작품이다.

제프 쿤스 (Jeff Koons)의 ‘퍼피 (Puppy)’라는 작품부터, 우리나라 리움 미술관에서도 전시된 적이 있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엄마 (Maman)’ 외 다른 여러 작품들이 미술관 앞에 설치되어 있고, 미술관 안에서도 스페인 작가들과 세계적인 여러 작가들의 현대 미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작은 도시, 바스크 문화의 중심지인 빌바오는 스페인의 여느 도시와는 사뭇 다른, 독특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배낭없이 등산화가 아닌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걸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발목도 훨씬 덜 아프다. 반나절 천천히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와서 동네 구경을 한다. 시원한 강바람, 그림같은 도시 풍경. 큰 배낭을 짊어지고 땀범벅이 되어 절뚝절뚝 걷던 순례자에서 미술관 투어를 위해 찾아온 여행객으로 나는 잠시 변해 있었다.


Distance: 빌바오 미술관과 도시 구경
Time for walking:  10:00 am – 7:00 pm
Stay: 호텔 in Bilbao 
A thing to throw away: 등산잠바 (얇고 가벼운 등산잠바 하나와 좀 더 두터운 등산잠바 하나를 가져왔다. 하나면 충분할 터, 얇은 잠바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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