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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May 24.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5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5


어제의 계획대로 오늘은 새벽 일치감치 일어났다. 5시 반 기상, 이빨만 닦고 짐을 챙겨 길을 나선다. 달과 별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출발하면 순례자길 사인을 찾는데 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손전등은 필수품이다. 다행히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섭지는 않다. 오늘 나의 목적지는 팜플로나 (Pamplona) 다. 스페인 북동쪽 피레네 산맥 기슭에 위치한 작은 도시지만,  순례자길을 걷다가 만나는 도시 중에는 꽤 큰 도시에 속한다. 과거 요새였던 팜플로나는 로마의 장군 폼페이(Pompey)에 의해 건설되어, 10세기 나바라 (Navarra)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순례길의 중심 도시였고 프랑스와의 교역 거점이기도 했다. 매년 7월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몰이 축제인 산 페르민 축제 (Los Sanfermines)가 열려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황소가 좁은 골목을 미친듯이 달려가고 그 황소를 피해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헤밍웨이의 ‘그래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에도 등장하는 도시다. 스페인과 투우 경기를 좋아했던 헤밍웨이. 그의 흔적은 팜플로나 도시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호텔, 카페, 그리고 그의 동상까지. 


오늘 팜플로나까지 걸어야하는 거리는 17킬로다. 점심때쯤이면 도착할 수 있겠다.


걷기 시작한지 5일째. 어제부터 왼쪽 발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수년전 교통사고로 두번의 수술을 받았다. 일상생활을 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지만, 장시간 걷기 어렵다. 무리해서 걷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무래도 배낭이 문제인 것 같다. 내 몸무게에 10킬로가 불어난 무게를 발이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발뿐 아니라,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어깨 통증도 심해져서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짐에 대한 고충은 나뿐만이 아니라 순례자 모두에게 힘든 문제다. 짐없이 걷기에도 힘든 길이기에 어떻게든 배낭 무게를 줄이려 애쓴다. 하지만 대부분 한두달 동안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챙겨 온 터라 무엇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한다.


배낭의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방법에는,


1. 필요 없는 물건은 버린다.

2. 내게 필요없지만 다른 순례자에게 유용한 물건은 순례자 숙소에 기부한다.

3. 당장 필요없지만 버릴 수 없는 물건은 집으로 부친다.

4. 당장 필요없지만 순례자길이 끝난 후 필요한 물건은, 중간 지점의 큰 도시나 마지막 지점인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부치거나 (한달정도 보관해 준다), 산티아고 근처 짐 보관 서비스를 해주는 한국인 민박집으로 보낸다.

5. 매일 필요한 물건이지만 도저히 메고 갈 수 없는 경우에는, 출발 전 짐을 옮겨주는 택시 서비스를 이용해 도착지 마을까지 배달시킨 후 걷는다.


많은 순례자들은 일주일쯤 지나면 위의 여러가지 방법 중에 자신의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어떻게든 배낭의 무게를 줄인다. 나 또한 짐을 메고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고달픈 일인지 몰랐다. 가방만 없어도 날라 다닐 것만 같다. 짐이 가벼워지면 걸어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좀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어깨와 발목의 통증도 사라질 것이고. 하지만 짐을 어딘가로 부치거나 택시로 미리 보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내 짐이고, 정 그 짐을 메고 갈 수 없다면, 버려야 한다. 


배낭의 무게는 내 욕심의 무게다. 침낭이나 노트북, 카메라 등 순례자길을 걷는 동안 내게 꼭 필요한 것들도 있지만, 없어도 큰 지장이 없는 물건들도 있다. 이곳에서 사용하지 않는, 한국에서 쓰던 핸드폰이며, 여벌의 옷들, 넉넉하게 가져온 갖가지 비상약, 근육밴드, 우비, 우산 등등. 당장 꼭 필요한 게 아니더라도 버린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비가 절대로 올 것 같지 않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우비와 우산은 여전히 내 배낭 안에 있다. 욕심을 버리고, 무언가를 내려놓는다는 말. 법정스님과 같은 무소유까진 아니어도, 덜 갖고 덜 욕망하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은 진정 마음뿐이었던 걸까. 이렇게 작은 것 하나 버리는 것도 어려워하면서 난 내 인생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부터 이 길이 끝날 때까지 내가 가진 물건들을 하루에 하나씩 버리기로 했다. 아주 작은 것일 수도 있겠고,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묵직한 것이라면 더 좋겠다. 아무튼 난 내 배낭을 메고 끝까지 걸을 것이다. 무게를 줄이든, 아무것도 버리지 못해 그대로이든. 발목과 어깨가 아프지만, 내 욕심에서 기인한 일, 그 욕심을 줄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요행으로 내 욕망을 모른척 덮어두고 싶지 않다. 내 안의 욕심과 내 몸의 힘겨움, 그 사이에서 난 매번 힘든 결정을 해야할 것이다. 

‘저 쪽 뒤쪽에 가서 줄 서세요.’

‘사람도 몇명 없는데,  굳이 줄 설 필요가 뭐가 있죠?’

‘그래도 온 순서대로 들어가야죠. 뒤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올 줄도 모르는데. 그러니 저 쪽에 가서 차례대로 줄 서세요.’


어제 묵은 순례자 숙소 앞에서 일등으로 도착한 스페인 남성과 조금 늦게 도착한, 줄을 서지 않고 문 앞쪽에 앉아 있던 여성이 나눈 대화다. 스페인어였지만, 대략 어떤 대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보통 순례자 숙소는 씨에스타 끝날 무렵인 오후 4시쯤 문을 연다. 그래서 그 전에 도착하면 입구 앞에 도착한 순서대로 배낭을 세워 놓고 기다린다. 오늘 아침 걷다보니 어제 그 줄을 세우던 남성이 내 옆을 지나친다. 


‘올라!’

‘올라!’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대화는 항상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어제 우리 같은 숙소에서 잔 거 같은데.’

‘네 맞아요. 어제 줄세우시던 것 인상적이었어요.’

‘아 그랬나요. 혼자 걷더라도 순례자 숙소는 단체 생활이니 질서도 지키고 서로 예의도 지켜야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늘 어디까지 갈 계획이에요?’

‘팜플로나요.’

‘나도 거기까지 갈 생각이에요. 작지만 역사가 깊은 도시죠.’

‘처음이 아니신가봐요.’

‘네, 저는 오래 전에 가봤어요. 이 길도 처음은 아니거든요.’

‘그러시군요.’


키가 큰 그는 나를 위해 발걸음을 조금 늦췄고,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조금 빨리 걸어야 했다. 그의 이름은 하비르. 스페인 남부지방 그라나다 근처 고등학교에서 스페인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어제 줄 세우던 모습, 딱 학교 선생님이다. 방학 때마다 일이주 정도 시간을 내서 순례자길을 걷는다고 한다.


‘머리 굵은 고등학생들 가르치기 힘들지 않으세요?’

‘어느 나라나 그 나이 때 공부하기 싫어하고 말 안듣는 학생들이 많긴 하죠. 그래도 문학을 좋아하니 가르치는 재미도 있어요.’

‘저도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답니다.’

‘아 그래요? 나도 러시아 문학 작품들 좋아해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러시아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는 흘러흘러 이곳 스페인으로.


‘경제가 안 좋다는데, 정말 그렇게 안 좋은가요? 제가 시골 마을들만 봐서 그런지, 경제 상황에 대한 걸 직접 느끼긴 어렵던데요.’

‘네 아주 안 좋죠. 실업률이 20% 정도니까요.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거나 아예 구할 생각도 못하고 있죠.’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그 이유들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유로존의 위기, 그리고 자산가치 하락, 유럽 내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독일과 그 외 국가들의 위기와의 연관성, 뉴스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이다.


‘그럼 직장이 없는 젊은이들은 어떻게 먹고 사나요?’

‘이 위기에도 아직 스페인 경제가 붕괴되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그들의 부모들 덕분이에요. 자식들이 직장에서 짤리거나 취직이 안되면 부모가 자식들을 지원합니다. 데리고 사는 건 기본이고, 국가에서 받는 그들의 연금으로 자식들 용돈도 주고, 부족하면 집도 팔고 하지요.’

‘그런 점은 한국 부모와 비슷하네요.’

‘가족의 끈이 아주 단단한 나라에요. 국가와 사회 구조의 문제인데, 그렇게 개개인들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게 슬픈 현실이죠.’

왜 어디나 국가, 정치, 경제 문제의 피해자는 힘없는 개인들일까.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체계나 정책을 결정하고 유지시키는 결정권자, 그런 권력을 쥔 조직, 정치인, 국가 관료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 사회에 사는 건 매우 고달프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런 곳이 점점 더 늘어만 간다.


그는 애써 내 느린 걸음에 맞추지만, 내 숨은 점점 더 차오른다. 이미 긴팔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오늘도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런데 어제부터 불편하던 왼쪽 발목이 점점 더 묵직하게 아파온다. 헤밍웨이가 오래 머물며 소설을 썼던 도시, 팜플로나로 나는 천천히 들어서고 있다. 한쪽 발을 절뚝거리며.


Distance: 라라소아나(Larrasoana)에서 팜플로나(Pamplona)까지 17km 
Time for walking:  6:00 am -12:00 pm 
Stay: 팜플로냐 공용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긴 등산바지 (새로 사 온 등산바지. 비가 오거나 서늘한 날 입기에 좋은 바지지만 이 뜨거운 날씨에 입을 일은 당분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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