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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May 24.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4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4

 

오늘도 태양을 마주하며 시작하는 날이다. 상상할 수 없을만큼 뜨거운 태양. 미국 캘리포니아 데스밸리 사막 한가운데의 태양보다도 강렬하다. 삼일 동안 한낮에 걷고 나니 팔다리는 포도껍질처럼 까맣게 타버렸고, 몸 속의 피마저도 포도주처럼 검붉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이 뜨겁고 눈부신 태양은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린다. 나뭇잎도, 저 멀리 보이는 빨강 지붕도, 계곡의 투명한 물살도, 지나가는 사람의 이마도 모두 하얀색이다. 모네의 시선을 훔쳐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인상파의 색채를 이 순간 온전히 이해한다.

오늘 도착한 곳은 라라소아나(Larrasoana), 순례자 일정표 상의 둘째날 종착지점이다. 보통 이틀에 걷는 52킬로를 4일 동안 걷고 있는 셈이다. 첫날 길을 잃어 10킬로 넘게 더 걸었으니 4일 동안 65킬로 정도 걸었다.  


사실 오늘은 두시간 밖에 걷지 않았다. 어제 무더운 날씨에 무리를 해서인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10시부터 걸어서 이 마을에 도착한게 점심 무렵. 태양이 정수리를 쪼아대는 시각. 12,3 km를 더 가야 다음 숙소가 나오는데, 그럴려면 시에스타 내내 걸어야 한다. 이 태양의 열기 속에 오늘까지 무리해서 걸으면, 몸에 이상이 생길 것 같다. 오늘은 그냥 이 마을에서 쉬고, 내일은 새벽부터 걷기 시작해서 시에스타 전에 마쳐야겠다.

 

순례자 숙소를 찾아 들어가 접수를 하는데,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너무 뜨거워서 걷는게 진짜 힘드네요.’

‘올해 이상 기온이라더니 작년보다도 훨씬 더 뜨거운거 같아.’

‘오늘 42도라는데요?!’

‘한 두시 이후에 걷다가는 쓰러지겠어.’


오늘 기온은 42도. 체감 온도는 50-60도쯤 될 것 같다. 달걀이 땅 위에서 삶아질 것 같은 날씨다. 접수를 마치고 배정받은 침대 옆에 짐을 놓아두고 숙소를 나선다. 낮잠을 잘게 아니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방 안에 있기도 불편하고, 어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책이나 읽으며 쉬어야겠다.


작고 조용한 마을, 털복숭이 개 한마리만 그늘을 찾아 어슬렁댈뿐 인기척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저 멀리 막 도착하는 순례자들만이 한둘 보일 뿐. 이 마을에 하나뿐인 작은 구멍가게도, 레스토랑도 닫혀 있다. 레스토랑 건물 앞에 놓인 플라스틱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살랑살랑 더운 바람이 분다. 바람의 움직임 외에는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 아까본 털 많은 개가 건물 담벼락 아래 축 늘어져 누워 있다.

눈 앞에 커다랗게 서 있는, 어림잡아도 천년은 되어보이는 성당 꼭대기에는 언제 마지막으로 울렸을지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란 종 두 개가 걸려 있다. 소박하고 낡은 성당.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 이 고요가 잘 어울리는 연극 무대 같다.

 

5시쯤 되자, 레스토랑 주인이 나와 문을 연다. 삼사오오 앉아 있던 순례자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맥주를 들고 나온다. 나도 맥주 한잔을 마시며 앉아 있으니, 옆 테이블에서 책을 읽던 여인이 말을 건네온다.


‘날이 무척이나 덥죠?’

‘그러게요. 이 날씨에 걷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요. 유럽에서 더위로 사람들이 죽는다는 말을 이제야 알겠어요.’

‘난 네덜란드에서 왔어요. 그쪽은?’

‘전 한국이요.’

‘한국인들을 종종 마주쳤어요. 한국에서 오기엔 상당히 먼 곳 아닌가요?’

‘그리 멀지도 않아요. 하루면 오는걸요. 하하.’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훤칠한 키에 근육으로 다져진 늘씬한 몸매와 구릿빛 피부를 지닌,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이미 오래 걸은 것 같아 보이세요.’

‘한달 넘게 걸었어요. 프랑스에 있는 순례자길부터 시작했거든요.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 뜨겁지 않았는데, 스페인으로 넘어오니 여름이 무섭네요.’

‘전 이제 고작 4일째인데, 벌써 더위를 먹은 것 같아요. 온몸에 기운이 없어서 오늘 이 마을에 주저 앉았답니다.’

‘무리할 필요 뭐 있나요.나도 시에스타 끝나고 좀 더 가볼까 하다가, 그냥 쉬려고 해요.’


그녀는 네덜란드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지난 3년간 휴가없이 일만 했다고 한다. 


‘3년 동안 야근해서 쌓인 휴가14주와 연말 크리스마스 휴가 2주까지 더하니 16주의 휴가가 생긴 거에요. 회사에서 그러더군요. 돈으로 받을래 아니면 넉달 놀래? 반년치에 해당하는 연봉과 4개월의 휴식 중, 전 당연히 휴가를 선택했죠. 돈으로 새로운 경험을 살 수는 없으니까. 이 정도 나이에 새로운 경험을 얻는다는 건 돈을 버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죠.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으니까.’


누구나 이런 말은 쉽게 한다. 하지만 휴가와 돈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돈을 선택한다. 물론 우리나라에 그렇게 긴 휴가를 주는 기업도 없거니와, 우리 스스로도 그런 휴가에 익숙하지 않다. 설사 꽤 긴 휴가가 주어져도, 맡은 일이 많아 도저히 자리를 떠날 수가 없어서, 또는 일이주 휴가 가는 게 눈치가 보이거나 동료를 배려한다는 등의 이유로 장기간의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자신의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떨어져 있을 틈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이란 그런 틈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말이다.


새로운 경험이야말로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한다. 경험이란 이스트처럼 몸과 영혼에 화학 작용을 일으켜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도 결합하여 또다른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경험이란,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과는 별개로 많이 할수록 좋다. 자신에게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지.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이랄 것이 별로 없는 삶을 살아간다. 세상 다 안다는 듯한 태도로 새로움은 번거롭고 귀찮은 것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조금만 세상을 향해 나아가 보면 내가 아는 것이, 내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 알게 된다. 그런 나를 바라보려면, 내가 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져야 한다. 벗어나지 않고, 새로운 경험 없이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알고 있는, 또는 경험한 세상이 전부인양 자만에 빠지기 쉬우며, 나와 다른 경험을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은 점점 더 줄어든다.

 

‘한달쯤 걸었으면 이미 많이 익숙해졌겠어요.’

‘처음 일이주는 배낭 때문에 걷는게 힘들었죠. 그리고 그동안 매여있던 많은 일들, 집에 쌓여있을 메일들, 처리하지 못하고 떠난 회사 일들, 부모님의 안부 등 내가 몸담았던 삶의 조각들이 내 몸 속 어딘가를 끊임없이 떠다니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진짜 이 길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도 해요.’

‘그러게요. 스위치를 꺼버리듯 처음부터 이 곳에 온전히 집중하게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근데 한 이주쯤 지나면, 서서히 그런 ‘나’로부터 거리가 생기기 시작해요. 새벽에 일어나 푸르스름한 하늘을 보고 걷기 시작해서, 한두시간 후 도착한 마을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걷고…또 걷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오늘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지 않게 되요. 그냥 내 몸을 도구 삼아 온전히 살았다는 기분이죠. 그리고 그것이 이 길에서 얻은 평온함이구요.’


그녀의 밝은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반짝인다. 그래 난 이제 겨우4일째니 이런 저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그녀가 말한 2주가 지나면 나도 평온함을 얻을 수 있겠지. 아름다운 그녀의 이름은 마고(Margo)였다.


Distance:  수비리(Zubiri)에서 라라소아나(Larrasoana)까지 6km
Time for walking:  10:30 am - 1:00 pm
Stay: 라라소아나 공용 알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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