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atman May 25.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9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9 다시 시작


어제 순례자 숙소 접수할 때 내 뒤에 서 있던 커플은 ‘Just married’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있었다. 오전에 해안길을 따라 걸을 때 앞서 걷던 이들이다. 매우 다정해보인다 했더니 역시나 갓 결혼한 신혼부부였다.

‘네 지금 신혼여행 중이에요. 저희가 2년 전에 프랑스 길을 각자 혼자 걸을 때 만났거든요. 2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을 오가며 연애하다가 지난 주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저희가 처음 만난 프랑스길을 다시 걷자고 갔는데, 날씨가 정말 견딜 수 없이 덥더라구요. 삼사일 걷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이곳, 북쪽길로 올라왔죠.’


이탈리아 남자와 독일 여자의 만남. 혼자 오는 사람들이 유독 많은 순례자길. 청춘남녀의 사랑을 어찌 예측할 수 있으랴. 그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깃발을 흔들어 보이며 축하를 받는다. 


마고는 이 길이 이별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별 후 이곳을 찾는다고. 그래서 유독 혼자 걷는 사람들이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별의 아픔을 겪고, 이별을 치유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 순례자길. 인생의 순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축약해서 겪는 길이다. 한두달 이 곳에 머문다고 다 깔끔히 해결되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아픔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인연을 꼭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짧지 않은 여정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목격한다. 


깃발에 새겨진 하트보다, 상기된 그들 얼굴에 담긴 하트가 더 아름답다. 이 긴 길을 함께 걸었던 그 마음으로 그들의 인생도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란다. 하지만 항상 좋을 수만도 없는 인생길. 이 길 위에서 함께 했던 시간은 그들이 앞으로 겪을 힘든 순간들을 극복하는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순례자 숙소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북쪽 길을 따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그리고 이곳을 거쳐간 어떤 순례자가 놓고 간 북쪽길 안내 책자도 발견했다. 자세한 정보가 잘 정리된 책자다. 북쪽길을 걸을 이유가 점점 더 많아진다.


1. 프랑스 길보다 덜 붐빈다. 따라서 숙소를 잡으려고 지나치게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

2. 북쪽길은 프랑스 길을 이미 걸어본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 순례자길에 대한 다양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3. 내륙으로 횡단하는 프랑스 길보다 산과 바다 등 더 다양한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4. 프랑스길로 지금 내려가면 쪄죽을 듯한 날씨를 견뎌야 한다.

5.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프랑스길로 돌아가면 된다.

6. 프랑스길보다 더 험한 길이다.


마지막 6번, 험하다는 말에 더 궁금해진다. 얼마나 더 험하다는 건지, 힘든만큼 또 다른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산세바스티안에서부터 북쪽 순례길을 따라 걷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오늘 첫날, 산세바스티안에서 오리오(Orio)까지 걸을 예정이다. 17킬로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로, 평이 좋은 사설 순례자 숙소도 있는 곳이니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거기까지만 가보기로 한다. 길을 나서니 하늘에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해뜨기 직전 태양빛에 붉게 물든 하늘과 구름. 걸음을 멈춰 한참을 바라본다.


이미 백킬로쯤 걸었는데 산티아고까지 795 킬로 남았다는 사인이 나온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다. 800킬로를 꼭 채워야할 필요는 없지만, 저 남은 킬로 수를 보며 내가 얼마나 더 가야하는가를 가늠한다. 길의 시작은 내가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계속해서 시작과 끝을 되새기는 것은 내가 무언가 끝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 위한 습관일 뿐이다. 이 길을 어떤 식으로 걷든, 내가 지나온 길만큼 딱 그만큼 새로운 경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백킬로 이상만 걸으면 발급해 주는 순례자 증명서가 이 길의 끝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다시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내가 걸어온 길, 지난 열흘간 겪은 일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미 나는 순례자 길 한복판에 서 있다. 내겐 이곳이 시작도 끝도 아닌 그저 걷고 있는 중에 스치는 한 장소일 뿐. 


해안길을 따라 걷는 길이라고 해서, 제주 올레길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제주도와는 전혀 다른 산과 언덕, 숲, 그리고 바다가 보인다. 꽤 높은 산도 올라야 한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 위에 떠있는 푸른 하늘, 그리고 구름과 맞닿아 있다.


오리오라는 사인을 따라서 얼마나 걸었을까. 점심시간 즈음 마을에 도착했다. 해가뜨기전 출발해서 점심때 도착하니 여유롭다. 오늘은 빨래도 하면서 푹 쉬면 되겠다. 순례자길 위에서 걷고 먹고 자는 것 외에 또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빨래다. 두세벌의 옷으로 한두달을 지내야하고, 하루종일 걷다보면 땀으로 옷은 금새 다 젖어버린다. 그래서 숙소에 도착하면 빨래 먼저 해야 한다. 해가 지기 전에 빨아야 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늦게 도착하면 빨래를 해도 다 마르지 않아 다음날 젖은 옷을 입거나 여벌이 있으면 덜 마른 옷을 가방에 메고 걸으면서 햇볕에 말린다. 그러다 운좋게 세탁기가 있는 숙소를 만나면 손빨래로 대충 빨던 옷들을 다 빨아서 햇볕에 뽀송뽀송 말리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오늘 도착한 순례자 숙소에는 세탁기도 있고, 널찍한 마당에 빨랫줄까지 넉넉히 매어져 있다.

주인 아주머니의 깔끔한 인상처럼 침대시트도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고,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한 숙소에서 바라본 경치는 어느 고급 리조트 못지 않았다. 마당에 펼쳐진 파라솔 아래 앉아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한다. 며칠이라도 더 묵고 싶은 그런 곳이다. 저녁은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요리해주는 순례자 메뉴를 먹기로 했다. 마을 아래로 내려가 레스토랑에서 먹어도 되지만, 친절한 주인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도 기대되고, 또 이곳에서 함께 묵는 다른 순례자들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기도 하다.


저녁이 되면 이곳은 천국이 된다. 낮의 뜨거운 태양이 먼산 너머로 붉은 기운만 남긴채 서서히 사그라들고, 확트인 앞마당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한여름 바람이라 믿기지 않을만큼 시원하다. 왜 스페인 사람들의 저녁 시간이 9-10시인지 너무나 잘 알겠다. 주인 아주머니의 딸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테이블 위에 그릇들을 세팅하고, 샐러드부터 가져다 준다. 이곳에 오늘 묵는 순례자는 열댓명 남짓. 그중에 순례자 식사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열명쯤 된다.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커플인 아모스와 프란체스카, 독일에서 온 데니스, 그리고 스페인 남부지방에서 온 후안이 앉았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는 비슷해서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독일에서 온 데니스는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가 유창하다. 후안은 영어가 서툴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스페인어로 대화가 가능한대도 나를 위해 영어로 이야기한다. 후안의 얘기는 옆에 앉은 데니스가 내게 통역해 준다. 그렇게 서로를 간단히 소개하고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간다. 


외향적으로 보이는 데니스의 이야기에 다들 귀를 기울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의 서독과 동독에 대한 이야기. 같은 나라 국민이지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갈등들, 이념적 자존심이 강했던 동독인들은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서독인들에게 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어디서도 자세히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사실 깊은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다. 그녀는 시리아에서 3년, 영국에서 2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살고 있다. 사십대로 보이는 그녀는 체격도 좋고 활기가 넘쳐 보인다. 하루에 30킬로씩 걷고 있는 그녀는 휴가를 내고 이주간의 일정으로 이곳에 왔다. 몇년전 프랑스길을 걸었는데, 사람도 너무 많고 레이스하듯 걷기 싫어서 이번엔 북쪽길로 왔노라고 했다. 


아모스와 프란체스카. 이탈리안들이지만, 콧대 높기로 유명한 이탈리안 같지 않은 분위기다. 아모스는 4년전 프랑스길을 혼자 걸었다. 800킬로를 28일만에 주파하는 동안 8킬로의 몸무게를 줄이고 돌아갔다. 처음 시작할때 짐의 무게는 10킬로였고, 끝날 때 무게는 5킬로였다. 짐을 반으로 줄이니 두배로 빨리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여름 뙤악볕 아래 내가 왜 이 짓을 하는지 끝나는 날까지 되뇌였다는 그. 너무 고생스러웠던 그 길이, 돌아간지 몇달이 지나면서부터 자꾸 떠오르고 되돌아오고 싶어졌단다. 일을 다시 시작해 바로 올 수 없었고, 삼년 후 다시오리란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삼년 후,  3년째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 프란체스카와 같이 북쪽길로 온지 삼일째. 까무잡잡한 얼굴에 짧은 스포츠 머리, 까만 뿔테안경에 장난끼 어린 눈빛이 매우 순수해 보인다.


프란체스카, 깔깔깔깔하고 웃는 그녀는,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줄곧 담배를 피워댄다. 귀여운 목소리에 애교가 넘치는 그녀. 그녀는 지금 발목이 아프다. 지난 이틀 동안 하루종일 걷고 난 후 발목이 많이 붓고 아파서 약을 바르고 있었다. 나도 비슷하게 아프다고 했더니 자기가 쓰고 있는 약을 바르라며 잠들기 전에 내게 가져다 주었다. 그녀의 속도에 맞추느라 아모스는 아주 천천히 걷고 있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정성스레 차려져 나온 샐러드와 파스타, 메인 디쉬인 치킨 요리, 그리고 와인까지 곁들여 제대로 차려진 스페인식 저녁 식사를 했다. 8시부터 10시가 넘어서까지. 이야기는 쉴새없이 흘러흘러 독일의 정치와 경제, 이탈리아의 졍경유착과 부패 이야기까지. 


유럽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쉽게 옆 나라를 여행할 수 있기에 서로서로 익숙한 부분이 많다. 언어적으로도 문화, 역사적으로도.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데니스의 첫말은 잘 몰라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태어난 나라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언어가 살면서 많은 것을 결정한다. 전혀 몰랐던 다른 세상,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은, 내가 보고 자란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과 함께, 내가 속한 세상을 좀 더 다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경제성장을 이뤄 세계 몇 위의 경제대국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나가보면 그런 시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저 먼 동쪽 끝, 중국과 일본 근처 어딘가에 붙어 있는 나라라 여겨질 뿐. 겸손한 자세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오후에 동네로 내려가보니 여행 안내센터가 있었다. 정말 작은 동네인데, 멋진 안내소가 있고 자료도 많았다. 순례자 북쪽길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숙소 정보가 잔뜩 담긴 책자를 받아왔다. 이 두 개면 어디든 갈 수 있겠다. 조금 무겁지만, 내게 꼭 필요한 것들. 


Distance: San Sebastian – Orio (16킬로)
Time for walking:  7:00 am – 12:00 pm 
Stay: 사설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모자 (등산모자와 야구모자 두개를 가져왔다. 걷는 동안 등산 모자면 충분하다. 아끼던 모자지만, 아침에 순례자 숙소에 놓고 나왔다)




작가의 이전글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