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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01.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10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10 


길 위에서의 열번째 날. 처음보다 나아진 건, 자기 전이나 아침에 출발을 위해 짐을 싸는데 걸리는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는 것. 처음 며칠은 한시간쯤 걸렸는데 지금은 삼십분이면 충분하다. 매일 풀었다 다시 싸는 짐, 한달이면 15시간이다. 꽤 긴 시간이지만, 길을 걷는데 필요한 모든 살림살이가 들어있는 배낭을 요령껏 잘 싸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어떻게 싸느냐에 따라 1-2킬로 정도의 무게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열흘쯤 지나니, 어깨가 무거운 배낭에 적응을 한건지, 처음 며칠 겪은 극심한 어깨통증이 조금 나아졌다. 등에 근육이 붙은 모양이다. 여전히 배낭의 무게는 걷는 내내 내 어깨를 눌러대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견딜만 하다. 그리고 또 나아진 건 좀 더 일찍 일어나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8-9시에 걷기 시작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젠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쯤 걷기 시작한다. 어스름한 새벽, 해뜨기 직전에 숙소를 나서서 걷는 느낌이 참 좋다. 하늘이 새벽녘의 붉고 푸른 공기를 가득 품고 있어서 엄청 상쾌하고, 어둠이 사그러드는 하늘 빛은 그 어떤 조명보다도 찬란하다. 밤을 새고 새벽을 맞이하는 것에 훨씬 익숙했던 내게, 일찍 일어나 새벽공기를 마시며 걷는 것은 무척이나 새로운 경험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한시간 남짓 걸으니 곧 Zarautz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와 점심거리를 사야겠다. 걷다가 운좋게 마을을 만나 아침식사를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쭉 산길이나 들, 밭, 농장들 사이를 지나가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을이 보일 때 배를 채우거나 먹을 거리를 준비해 놓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7시 반, 아직도 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길거리엔 사람도 거의 없고, 상점들도 보이질 않는다. 저기 멀리 테니스 라켓을 든 중년 남성이 걸어온다. 망설일 것도 없이,


‘안녕하세요. 근처에 아침식사를 할 만한 곳이 있나요?’

‘나도 지금 막 운동 마치고 아침 먹으러 가는 길이니 같이 갑시다.’

‘여기서 먼가요?’

‘두군데가 있는데, 한곳은 오분이면 갑니다. 내가 가려는 곳이구요. 다른 곳은 좀 더 다양한 음식을 팔지만 조금 더 멀어요.’

‘그럼 저도 가까운 곳으로 갈께요.’

‘순례자인가 보네요. 얼마나 걸었어요?’

‘이제 열흘 되었어요.’

‘저도 오래 전에 순례길을 자전거로 횡단했었답니다. 이주 동안 800킬로를 달렸죠. 십년도 더 된 일이긴 하지만.’


스페인 사람이라면 이 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살아가면서 언젠가, 어떤 계기로든지, 누구나 한번쯤은 와봤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순례자를 만나면 반가워하기도 하고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자신도 걸었던 그 길을 낯선 얼굴의 이방인이 걷는 모습에 묘한 동지애 같은걸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길을 묻거나 음식점의 위치를 물으면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알려주려고 애쓴다. 


오분쯤 그를 따라 걸어가니 베이커리가 눈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 안쪽에 자리한 동네 빵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람들이 바 카운터에 쭉 앉아 신문을 읽으며 크라상과 커피 한잔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큰 오븐에 갖가지 빵이 구어지고 있다. 고소하게 구워지고 있는 바게뜨 냄새과 커피향이 가게 안에 가득하다. 이들의 아침식사는 달콤한 빵과 진한 커피 한잔이다. 싱글샷 또는 더블샷의 진한 커피나, 그 진한 커피에 우유를 부어주는 카페 콘라체를 마신다. 그리고 오렌지를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까지 곁들이면 아침식사로 충분하다. 나도 달짝지근한 크라상과 카페 콘라체,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고 천천히 가게 안 사람들을 둘러본다.


걷는다는 건, 바쁜 시선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 일상에 시선을 가 닿게 한다. 이 아침 동네 빵집에 들러 식사하는 할아버지, 신문을 읽으며 마시는 커피 한잔, 새벽같이 일어나 테니스를 치고 빵집에 들러 먹는 크라상과 주스. 이런 이들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일상을 떠올린다. 과거의 일상과, 지금 이 순간 순레자로서의 일상을. 나는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회사 가는 길에 여유있게 카페에 들러 빵과 커피 한잔을 마셔본 기억이 없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침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뜨고, 회사 가서 마시는 커피 한잔, 집에서 들고간 과일 한두조각 먹는게 지난 십년간의 내 아침식사였다. 삼십분 먼저 일어났다면 나도 똑같이 저런 여유있는 아침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나 스스로를 닥달하며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시간들. 나의 시선이 그들에게 낯설듯이, 저들의 시선도 내게 낯설다. 하지만 그런 낯선 시선 속에서 서로의 일상을 엿보고 또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되새김질한다.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한 날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를 보고 걱정했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면 어떻게 걷나. 우비를 써도 이 정도 비라면 온몸이 흠씬 젖을터. 시야도 가려져 걷기에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 뒤로 맑은 날의 연속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괴로워서 비라도 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오늘은 드디어 열흘만에 날이 흐리다. 뜨거운 태양이 가려진 바닷가는 썰렁하고 서늘하다. 기나긴 해변과 널따란 포도밭을 지나는 동안 후둑후둑 떨어지던 반가운 몇방울의 비도 금새 그쳐버렸지만, 간만에 뜨거운 햇빛없이 걷는 날이라 그런지 오늘은 조금 수월하게 느껴진다. 


마을을 지나칠 때는 좀 더 유의해서 순례자길 사인을 찾아야 한다. 여러갈래길이 나오고,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길도 많아서, 노란 화살표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리고 북쪽길은 프랑스길에 비해서 순례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앞사람을 따라 걸어갈 수도 없다. 바닷가 작은 마을에 들어섰는데, 모래사장을 바라보느라 잠시 정신을 팔았더니, 좀전까지만해도 보이던 노란 화살표가 사라졌다. 이럴땐 참 난감하다. 길거리엔 사람도 별로 없고, 간혹 보이는 시골 어르신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워 여쭤보기도 어렵다. 길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건넨다.


‘길을 잃었나요?’


돌아보니 나처럼 큰 배낭을 멘 남성이다. 그의 옆에는 마른 체구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균형잡힌 몸매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다.


‘네 조금 전까지 순례자길 사인을 보고 걸어왔는데, 여기 근처에는 사인이 없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알수가 없네요.’

‘이쪽으로 가는게 맞는거 같아요. 제가 가서 물어볼께요.’


그녀의 이름은 도미, 프랑스인이지만 스페인어가 유창하다. 그녀는 마을 사람에게 순례자 길을 물어보고 앞장서서 걷는다. 내게 말을 건 남성의 이름은 콴, 그들은 이 길이 두번째다. 이 길 위에서 처음 만났고, 연인이 되었다. 콴은 캐나다에서 배관공으로 일하고, 도미는 프랑스에서 선생님이다. 머나먼 두 나라에서 오래 사랑을 키워가고 있는 두 사람. 자주 보지 못하지만, 지금 이들은 이곳에서 매일, 매순간 함께 걷고 있다. 그들의 도움으로 잠시 잃어버렸던 길을 찾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함께 걷는다. 말수가 많지 않은 조용한 커플이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의 눈빛이 느껴진다. 둘다 40대 초중반쯤.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만 하는 건 없다.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그러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하는 식의 관계가 꼭 정답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없이 결혼하기도 하고, 사랑하고 결혼해도 헤어지기도 한다. 연애만 하면서도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고. 이들처럼 일년에 한두번을 만나도 관계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억지로 가지 않는 길을 찾아갈 필요는 없지만, 무조건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필요도 없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이든, 수많은 사람이 지나간 길이든, 내가 원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된다. 타인의 시선도, 자기 검열의 시선도, 다 걷어내고 온전히 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나 스스로에게 가장 떳떳한 길이지 않을까.


Distance: Orio - Zumaia (17km)
Time for walking:  6:30 am – 2:00 pm 
Stay: 사설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튜브 베개 (공기를 입으로 불어 넣는 튜브베개. 부피도 작고 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지만, 작은 것들이 모여 금새 1-2 킬로그램이 된다. 옷가지 몇개 겹쳐 베개로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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