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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07.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12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12


순례자 길은 인생길처럼 매우 다양하다. 숲길도 있고, 하루 종일 해안가를 따라 걷는 길도 있고, 그늘 하나 없는 사막같은 길도 있으며, 크고 작은 마을을 관통하기도 하고, 작은 골목길, 큰 대로 옆의 작은 황톳길 등등 다양한 길을 따라 걷게 된다. 

어제까지의 해안길을 뒤로하고 오늘 걸어갈 길은 저 멀리 보이는 산길이다. 잔디밭도 있고, 흙길도 있고, 숲속 큰 나무들 사이를 헤쳐 나가야 하는 길. 그 사이사이 목장이나 농장들이 삼삼오오 자리잡고 있어서 소나 말, 당나귀, 염소, 양들을 종종 마주친다. 우리에 갇아 놓고 기르지 않기 때문에, 이 길은 그들의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길 위에는 가축들의 분비물이 여기저기 잔뜩 쌓여 있고, 한여름이라 그 냄새 또한 지독하다.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오늘따라 그 분비물 위에 앉아있는 수십 수백마리의 똥파리들이 내게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이 파리들은 가축들의 얼굴과 몸에 붙어서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다. 

온몸에 흐르는 내 땀냄새가 그들을 유혹한다.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은 오늘, 장딴지 한 구석이 따금하다 싶어 쳐다보면 어느새 파리 한 마리가 내 피를 쪽 빨아먹고 난 다음이다. 팔과 다리 여러 군데 그렇게 물리고야 만다. 처음에는 너무 불결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소똥에 앉았었을 것이고 말피를 빨아 먹었을테니, 내 피부 속에 무언가 흘러들어왔을 것만 같았다. 나중에 순례자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병균이 옮는 건 아니니 걱정 말란다.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당장 확인할 길도 없으니 벌레 물린데 바르는 약을 대충 바르고 만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겐 이런 작은 일들이 꽤 신경 쓰이는데, 어쩌면 별거 아닌 일에 유난을 떠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집안엔 그런 파리들이 일상적으로 날라다닐테니 말이다. 내 무거운 배낭 안에는 숙소에서 침대가 배정되면 뿌리는 벌레 방지 스프레이, 물린데 바르는 크림, 물리는 걸 방지하는 크림, 그리고 버물리까지 벌레에 관련된 약만 4개가 들어 있다. 4개를 다 합하면 1킬로쯤 될거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일에 난 무척이나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내 가방은 그만큼 무거워진다는 사실. 무엇을 택할 것인가는 본인의 몫이다. 가벼워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매우 계획적인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여러가지 옵션을 고려한다. 무엇이 가장 나은 길인지, 현명한 길인지 오랫동안 생각한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변수만 고려된다.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의 변수는 아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작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번 시작한 일은 그 계획의 끝을 볼 때까지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좋은 점이라면, 작심삼일같은 계획은 잘 세우지 않아서 결과적으로는 끈기 있게 무언가를 하는 편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 계획을 세웠고 실행을 했다는 건 그것을 간절히 원했다는 말이니까. 그런데 동시에 단점도 있다. 새로운 시도를 쉽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방 포기할 것 같은 일은 아예 시작을 안하니 전혀 다른, 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시도하지 않는다. 또한 중간에 튀어 나오는 변수에 더 민감하다. 그건 내가 선택하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 모든 걸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살다보니, 그럴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된다. 열심히 준비해서 노력하는 거야 긍정적인 부분이지만, 모든 부분을 내 생각대로 해 나갈 수 있다는 건 자만이고, 그런 기대를 한다는 건 이미 실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일이 되어가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나머지는 내 소관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손을 잠시 떼어놓고 볼 수 있는 거리 감각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살아온 습관 때문에 여전히 쉽지는 않다.


처음에 프랑스길을 걷기로 하고 파리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걷다보니 사람이 너무 많고 걷는 것 자체가 경쟁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구 사람들처럼 긴다리를 가진 것도 아닌 내가 아무리 부지런히 걷는다 해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경쟁하지 않으면 숙소를 구할 수 없어 며칠 숙소 구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유럽의 날씨는 유별나게 더 뜨겁다. 특히 스페인의 태양은 모든걸 태워버릴 기세다. 내륙으로 걷는 길이라서 그 뜨거운 태양 아래 걸어가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견디는게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더위를 먹거나 일사병에  쓰러지기 쉽상이다. 


난 그런 상황 속에서 레이스를 하러 이곳에 왔나 싶으면서도, 내가 처음 계획한, 짜여진 일정을 소화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와 같이 걷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미 나보다 이삼일 앞서 걷고 있었고, 또 그들은 먼저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동네 구경도 한다. 나도 좀 더 빨리 걷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발목이 아파서 더이상 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길을 일주일쯤 걸은 후, 빌바오로 버스를 타고 올라왔고, 빌바오와 산세바스티안을 구경하고, 지금은 북쪽길을 따라서 걷고 있는 중이다. 경쟁하려던 내 마음, 처음 길로 다시 돌아가서 계획한 길을 마치고 싶어하던 내 마음을 찬찬히 바라본다. 주어진 숙제를 하듯 이 길을 걸으려 온 것이 아닌데 정해진 길, 그것도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닌, 나 스스로 계획한 그 계획 자체에 갇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려하는 내 자신을 일부러라도 멈추고 싶었고, 마침 발이 아파서 멈출 수 밖에 없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길 위를 걷고 있다. 우연히 북쪽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또 우연히 그 길에 대한 가이드북을 구하게 되어 며칠 걸어보기로 했다. 내가 살아오던 방식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을 걸어서 좋은 것들이 참 많다. 프랑스길보다 사람들이 훨씬 적고, 현지인들과 프랑스길을 이미 다 걷고 다시 온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하고, 프랑스길보다 숙소 경쟁을 덜 해도 되고, 프랑스길보다 10도 정도 낮아서 걷기에도 훨씬 좋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북쪽으로 올라오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구겐하임 미술관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온 도시가 들썩이던 산세바스티안의 축제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Deba에서의 투우경기는 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길에서 만날 수 없는, 바다와 산, 해안길과 숲길을 따라 걷는다. 산이 많아서 힘든 길로 알려져 있지만, 몸이 조금 더 힘들더라도 그 숲 속을 걷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자 치유의 시간이다. 

계획대로, 정해진대로만 살 수 없는게 인생인데 자꾸 그렇게 살려다보니 부딫히고 실망하고 힘들어한다. 인생에는 항상 변수가 있고, 우연이 있고, 또 필연도 있고. 다양한 요소들의 영향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생겨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았다면 마주하지 못했을 아름다운 인연과 감동적인 순간들이 내게 일러준다. 조금은 덜 계획하고 덜 치밀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힘든 산을 매일 오르고 걷고 있지만, 나무 그늘 아래로 바다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걸을 수 있다. 세상에는 다 좋기만 한 것도 다 나쁘기만 한것도 없다. 그래서 때로는 계획하지 않은 길에서 겪는 일들이 더 깊이 새겨지기도 하고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물론 예상치 못한 힘든 일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계획한대로 살아간다 해도 겪게 되는 일이다. 계획한대로만 살아간다면, 내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일을 경험하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내 사고의 틀 속에서 갇혀 살게 되는 것이다. 나이들수록 자신의 고집과 아집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내가 원하는 미래의 나의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 조금 더 발길닿는대로 걸어보려한다. 이곳을 걷다가 다시 프랑스길로 돌아갈 수도 있고 하비르가 일러준대로 마지막 부분은 프리모티브길로 올라갈 수도 있다. 미리 계획하지 않기로 한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숲길로만 길이 이어지고 있다. 십킬로 넘게 크고 작은 산들의 오르막을 올라가는 길, 힘에 부친다. 어제부터 내 발목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22킬로를 걸어야 숙소가 나오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산을 오르는 경우 시속 2.5킬로 이상 걷기 어렵다. 적어도 한시간에 십분은 쉬어야 한다. 평지거나 내리막이면 시속 3킬로쯤 걸을 수 있지만, 속도를 내기위해 무리를 해서는 안된다. 몸의 컨디션에 따라 걷는게 가장 중요하다. 오늘 22킬로를 걸으려면 적어도 8-9시간은 걸어야 한다. 아무튼 어제 늦게 잠이 든 탓에 7시반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게다가 처음 들어서는 길을 헤맨 탓에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것은 8시 반. 오늘은 아무래도 긴 하루가 될 것 같다.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급격한 경사를 오르는 산길이다. 아침이라 근육이 풀어지기도 전이고 이미 아파온 발과 발목 때문에 힘껏 발을 내딛기도 어렵다. 오늘 기온이 35도가 넘는다고 하니 힘든 하루가 예상된다. 


몇시간을 힘들게 산을 오르니 평평한 숲길이 나온다. 하늘을 찌를듯한 큰 키의 수백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 끝도 보이지 않는 길. 수백년 동안 순례자들이 걸었을 이 길. 내 뒤에도 내 앞에도 아무도 없다. 이 큰 산 속에 온전히 혼자된 기분. 몸은 매우 지치고 발목의 통증과 짐의 무게로 숲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몇시간째 산을 올랐다. 땀은 비오듯하고 햇볕은 점점 더 뜨겁게 비추고 있다. 

잠시 멈춰선다. 모자를 벗고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넘기고 눈을 감고 가만히 선다. 정말 몇초였을까. 가느다란 바람 한 줄기가 내 이마를 훑는다. 그리고 괜찮다고 속삭인다.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알 수 없는, 그저 ‘괜찮다’라는 말을 남긴채 그 바람은 사라졌다. 이 산길이 지금 힘들어도 곧 괜찮아진다는 말인지,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이 괜찮다는 말인지, 나란 사람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여도 괜찮다는 말인지...그 바람의 소리가, 하늘의 소리였는지, 이 길을 수없이 지나간 순례자들의 목소리인지, 숲의 정령의 목소리인지, 아님 내가 나 스스로에게 던진 말인지 분간하긴 어렵지만,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울컥한다. 그 순간, 턱에 차오르던 숨이 잦아들고, 땀에 젖었던 머리칼이 바람에 말라간다. 숲속에 잠시 안긴 채, 그렇게 몇 분을 더 서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정말 조금씩 괜찮아졌다. 내 안의 울음도, 몸의 통증도, 그리고 한낮의 더위도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10킬로는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이 많은 길이다. 12킬로를 거의 오르기만 했으니 이제 내려가야할 때다. 

 

오늘은 길이 끝날 때까지 산속 숲길만을 걷는다. 바다도 마을도 보이지 않는 기나긴 길. 힘든 길이지만 하루종일 나무 향기가 나에게 힘을 붓돋아 준다. 특히 키가 큰 소나무들이 중간중간 가득하게 자라고 있는 숲에서는 걸음을 멈춰 큰 숨을 들이킨다. 

한국의 소나무와는 사뭇 다르게 생겼다. 한국의 소나무는 키가 작고 옆으로 퍼져 자라지만, 이곳의 소나무는 한국의 소나무보다 서너배는 키가 크고 잎들이 달린 가지들도 늘씬하게 위로 솟아 있다. 하지만 그 소나무향만은 같다. 깊고 구수한 향기가 온 숲에 가득하다. 추석에 송편을 찔 때 나는 향,  산에서 따온 소나무 잎을 깨끗이 씻어서 찜통 바닥에 듬뿍 깔고 그 위에 잘 빚은 송편을 올려놓고 푹 쪄낼때 나는 그 소나무 향. 그 냄새가 지금 내가 이 숲 속에서 맡고 있는 소나무향이다. 이렇게 구수한 냄새를 스페인 북쪽 해안 근처 숲속에서 맡게 될 줄이야. 힘든 길이지만, 또 그래서 힘들지만은 않은 길이다. 이 아름다운 숲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들, 그리고 흰빛의 강렬한 태양, 내가 오늘 이 길을 잘 걸어낸다면 그건 순전히 자연의 힘 때문이다. 

 

오늘 걸은 길은 마을이 거의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20킬로가 넘는 길을 마을 없이 걸어가려면, 물과 충분한 먹을 거리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시간을 물과 음식 없이 걸어야하는데 그건 거의 극기 훈련에 가깝다. 중간에 식수대가 간혹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미리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적어도 1.5리터 이상의 물은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마저도 이런 더운 날씨에는 반나절이면 다 마시게 된다. 두세시간 걸으니 몇채의 집이 전부인 아주 작은 마을이 나온다. 첫 집을 막 지나려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손짓으로 물을 떠가라는 손짓을 하신다. 할아버지 집 대문 옆, 수도꼭지가 보이고 산을 한참 더 가야하니 물을 채워가라는 말씀이다. 감사한 일이다. 싸가지고 온 물은 이미 거의 다 마셔버려 안그래도 걱정이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담겨있는 물을 다 버리고 새로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을 가득 채웠다. 수도꼭지에서 받은 물을 마셔본 적은 거의 없다. 물갈이로 탈이 날 수도 있어서 매일매일 미리 생수를 사다 놓는데, 어제 머문 마을의 모든 수퍼가 축제라서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미리 사지 못했다. 근데 다른 순례자들과 이곳 현지 사람들은 길거리에 있는 개수대의 물을 그냥 마신다. 현지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냥 먹어도 탈 안나는 깨끗한 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익숙치가 않아서, 또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생수를 사서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다. 이 작은 마을에서 물을 살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급하게 물을 받아서 꿀꺽꿀꺽 마시고 햇볕에 투명한 물통을 비춰보니 물이 누런게 아닌가.  소, 말, 양 등의 분비물이 쌓여있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왔고, 그 길에 연결되어 있는 이 마을, 그 땅의 지하수 물일텐데…순간 내 배낭 안에 지사제가 있음에 안도한다. 아무래도 이 물을 다 마시면 큰 탈이 날 것 같다. 다행히 몇집 건너 작은 카페를 하나 발견했다.  아이스 커피 한잔을 마시고, 레스토랑 수도꼭지 물로 다시 채웠다. 다행이 누렇지는 않다. 물은 다 쏟아버렸지만, 그 할아버지의 호의와 친절은 감사히 마음 속에 새긴다.


오늘은 열시간 넘게 걸었다. 일어난지 열두시간만에 숙소가 있는 Markina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또 길 위에서 여러번 마주친 이탈리안 친구들과 함께 도착했다. 이미 저녁 6시가 넘은 시간이라 순례자 숙소에 자리가 남아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나 어제 머물렀던 마을보다 큰 마을이고, 순례자 숙소가 두 개나 있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아무튼 힘겨운 다리를 이끌고 도착한 숙소에는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몇번 겪은 일이지만 오늘처럼 목도 너무 마르고 몸도 지칠대로 지친 날엔 풀썩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모스가 들어가서 접수대에 앉아 있는 여성과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 근처에 최근에 문을 연 사설 순례자 숙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숙소 주인 여성이 곧 차로 데리러 올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북에도 나와있지 않은 사설 숙소다. 아모스가 없었다면,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내가 그런 얘기를 알아듣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이탈리안 친구들 덕분에 오늘 숙소를 무사히 구했다. 

잠시 후 주인 여성이 차를 몰고 왔고, 우리를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 한복판을 빠져나가 십여분 달려가니 돌로 튼튼하게 지은 큰 저택이 저멀리 보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이층 창가 쪽 침대를 고르고 짐을 내려놓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열시간 이상 걸었고, 숙소를 구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까지 12시간. 다리가 심하게 붓고 아파온다. 이 상태로 내일 걸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오늘은 탈수 증상처럼 물을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말랐다. 얼른 샤워를 하고 맥주라도 한잔 해야겠다. 그런데 몸이 천근 만근 일어나지지 않는다. 누워있으니 같이 온 친구 프란체스카가 다가와 말을 건다.


‘어디 아파? 괜찮니?’

‘응…오늘 몸이 너무 힘들어서.’

‘발은 어때?’

‘발목이 다시 아파와.’


나았던 발목이 오늘 무리해서 걸은 탓에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카도 발목이 좋지 않아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는 중이었다. 잠시 후,


‘이 약 내가 바르고 있는데 도움이 되는 거 같아. 샤워하고 좀 발라봐.’

‘응 그럴께. 고마워.’


그녀가 건네준 약은 근육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크림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조금 살 것 같다. 약도 바르고, 프란체스카의 남자친구인 아모스가 건넨 산미구엘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킨다. 아 시원하다. 그리고 아까 우리를 데리러 와 준 주인 여성이 정성스럽게 차린 순례자 저녁도 함께 먹었다. 달짝지근한 스페인 와인, 샐러드, 파스타, 그리고 돼지고기 메인 요리에 디저트까지. 늦어도 10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하는데, 며칠을 함께 걷게된 동갑내기 이탈리안 친구들과 11시까지 쉼없이 수다를 떤다.


아모스와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아프리카 케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고, 그곳에서 둘은 중학교 동창이었다고 한다. 그 후로 대학은 다른 나라에서 각자 공부하고, 아모스는 이탈리아에서, 프란체스카는 미국에서 일하다가 삼년 전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만나 현재는 이탈리아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삼년 정도 일하고 돈을 모은 후, 반년 동안 세계 여행을 다니고 있는 그들은,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경험을 가진 두 사람. 그들과 나눈 대화는 이탈리아의 역사, 경제와 문화, 그리고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를 사랑하지만, 현 정치 경제 상황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좌절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둘다 매우 흥분한 모습이었다. 사랑하지만 떠날 수 밖에 없다는 모국, 그들도 곧 이탈리아를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화려한 관광대국 뒷면에 대한 이야기를 짧은 시간, 깊고 진지하게 들을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의 약 덕분인지, 캔맥주와 와인 때문인지, 오랫만의 깊은 대화 때문인지 발목의 통증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Distance: Deba - Markina (22km) 
Time for walking:  7:30 am – 7:00 pm 
Stay: 사설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잠옷 티셔츠 (편하게 잠옷으로 입던 티셔츠인데, 이것 말고도 반팔 티셔츠는 두개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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