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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07.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13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13


어제는 탈수증세가 심할 정도로 힘든 일정이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다시 걸을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울 정도로 온몸이 지쳐 있었다. 그리고 발목도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리해서 걷는 게 내 욕심은 아닌지, 이렇게까지 아픔을 참아가며 걸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나 스스로에게 명확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행히 발목은 어제보다 많이 좋아져 있었고, 그렇게 아프던 다리도 조금 뻐근한 걸 빼고는 놀랍게도 괜찮다.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순간, 몸은 머리보다 앞서 그 한계를 인식하고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에 있다.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몸은 어떻게든 견뎌내고, 그 상황에 적응해 나간다. 살기 위해, 그 산들을 넘기 위해 내 장딴지는 단단하게 굵어지고 있고, 내 등도 10킬로의 배낭을 견뎌내기 위해 말근육처럼 탄탄해지고 있다. 그건 내 머리가 아니라 몸이 스스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한계’ 안에 갇혀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일들이 많다. 내 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내 마음도, 정신도 그럴 것이다. 진지하고 깊은 생각은 중요하나, 결코 그 생각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것, 생각 그 이상의 가능성을 열어둘 것, 그리고 몸과 마음의 능력을 온전히 믿어줄 것. 인간은 유한하고 한계 또한 분명 있을 테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해낼 수도 있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굵어지고 있는 내 두 다리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루 만에 많이 좋아진 내 발목도 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니, 역시 내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나도 그렇고, 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도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한다고 했다. 왜 이 땡볕 아래, 숨을 헉헉 거리며, 다리를 절어가면서까지 이 길을 걷고 있는지. 

4년 전 이 길을 걸었던 아모스는 걷는 내내 빨리 끝내 버려야지하는 생각으로 28일만에 800킬로를 걷고 돌아갔다. 걷는 내내 이 짓을 왜 시작해서 이 고생인가라는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경주처럼 시작된 길, 끝을 내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간 직후부터 점점 더 생각이 나기 시작하더란다. 그래서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했고, 결국 그는 여자친구와 다시 이 길을 걷고 있었다. 다 걷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제서야 왜 걸었는지, 그로 인한 영향은 무엇인지 서서히 알게 된다고 했다. 알약처럼 먹은 즉시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게 아니고,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또는 평생 그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산티아고 순례길. 


나도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은 엘에이 한복판 불꺼진 오피스 빌딩에서 자정까지 일하던 순간에도, 말레이시아 정부기관을 상대로 프리젠테이션을 하던 순간에도 떠올랐던 질문과 같다. 매일 출근해서 내게 온 수십개의 이메일에 답장을 할때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자료를 검토할 때,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지곤 했다. 무언가 내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닥파닥 움직이는 삶의 생기가 시들시들 죽어가는 듯한 느낌. 

여기서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건,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내 몸의 생기를 직접 체험하는 중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내가 왜 걷느냐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이 행위를 지속해야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적어도 죽어가는 느낌은 들지 않으므로. 나는 살고 싶으므로.

그렇다면 과연 나는 이 길 위에서 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입은 옷이 다 젖을 만큼 매일 땀을 흘리고, 서너시간 걸으면 배가 고파오고, 하루에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셔도 갈증이 나는 내 몸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지금, 무언가 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기분이다. 그것이 근육이든, 햇볕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려고 자라나는 피부털이든, 무언가가 몸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느낌.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몸의 실체를 고스란히 느끼는 기분은, 내가 TGV안에서 느꼈던, 내 마음이 온전히 원해서 이곳에 존재한다는 느낌과 일치한다. 산다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바를 행하며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것, 내 존재만으로도 충만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살아있게끔 만드는 원동력이다.


살면서 내리는 결정이나 선택, 행동의 이유를 모두 명확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 순간이 답답하거나 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돈을 벌고 일을 하고 커리어를 쌓는 일이 더 효율적인 삶일 수도 있다. 효용 가치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 물론 중요하다. 살면서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이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효용 가치란 어디까지나 사회적, 경제적 관점일 뿐,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라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더 효용 가치가 있는 삶인지는 사회적 기준에 비춰보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짐을 챙겨 길을 나서고 하루에 대여섯시간에서 열시간 동안 온 몸이 땀범벅이 될때까지 걷는 하루. 그 하루 중에 내가 의도적으로 거울 앞에 서는 순간은 없다. 순례자 숙소 화장실이나 욕실에는 거울이 없는 경우가 많고, 내 배낭 속 어딘가 깊숙이 박혀 있는 작은 손거울을 꺼내서 얼굴을 들여다 볼 일도 없다.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이빨만 닦고 선크림을 대충 바르고 길을 나선다.

단장이랄 것이 없는 생활. 빨리 길을 나서야 하기도 하고 다들 자는데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챙겨서 바를 시간도, 그럴 화장품도 내 배낭 안엔 없다. 이렇게 거울을 보지 않고 산 적이 있을까. 어쩌다 보게 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다. 까매진 얼굴, 햇볕에 그을린 머리칼, 조금 야읜 듯한 얼굴과 몸. 길 위에서 벌써 이주를 보냈다. 매일 거처를 옮겨야하고 가지고 있는 짐을 매일 풀었다가 다시 싸야 한다. 매일 먹을 것을 미리 구해야 하고, 저녁은 어디서 무얼 먹을지, 오늘은 어디서 자게 될지 그날의 운명은 그날 그날 정해진다. 운좋게 휴양지같은 순례자 숙소를 만나기도 하고, 이삼십명이 쓰는 숙소에 달랑 욕실 하나 화장실 하나인 곳을 만나기도 하고, 침대시트가 호텔처럼 깨끗한 곳도 있지만, 수백명이 거쳐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침대 밑 어딘가 벌레가 박혀 있을거 같아 벌레방지 스프레이를 잔뜩 뿌리기도 하고, 벌레에 물릴까봐 아무리 더워도 긴팔 티와 긴바지에 양말까지 껴신고 침낭 안에 들어가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잠이 들기도 한다.    


이 모든 경험이 내 얼굴을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을 것이다. 피부색뿐만 아니라 표정이나 몸짓까지도 조금씩 변하길 바란다. 조금 더 편안해지길, 그리고 조금 더 너그러워지길.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도. 조금 덜 긴장하고, 조금 덜 욕심내며, 조금 덜 찡그리고, 조금 덜 아파하길. 이 길을 걸으며 이 모든 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다는 아니어도 괜찮다. 그러길 바라는 것도 내 욕심일터. 


지금 이순간 순례자 숙소 마당에 펼쳐진 파라솔 아래 조용히 앉아서, 옆 테이블에 앉아 카드 놀이를 하고 있는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의 수다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수십년 한동네에 살면서 나눴을 이야기들이 익숙하게 들려온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햇살도 여전히 강하게 비추고 있는 이른 저녁. 등 뒤에는 오늘 내가 묵을 깔끔한 숙소가 있고, 샴푸로 빤 오늘 입은 옷가지들이 뽀송하게 말라가는 이 순간… 평온함, 마고가 말한 그 평온함이 밀려온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분이 작은 접시에 치즈 케익 한조각을 담아 내게 건네신다.


‘무차스 그라시아스!’

‘나다~’ 

무척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다. 스페인의 아주 깊은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내 얼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을 알 것 같다. 할머니의 깊은 주름에 얹혀진 환한 웃음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밝아진 내 얼굴이 보인다. 아름다운 꽃들이 숙소 옆 작은 화단에 알록달록 심어져 있고, 순례자 숙소 일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안에서는 동네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영화보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면 레스토랑 부엌은 저녁 식사 준비로 분주해질 것이다. 그리고 8시 반이 되면, 나도 몇몇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것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거울 보는 습관, 이 길 위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지고 만다. 


Distance: Markina - Ziortza (7 km) 
Time for walking:  7:30 am – 12:00 pm 
Stay: 사설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비비크림 (로션 하나, 선크림 하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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