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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07.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14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14 게르니카


며칠째 함께 걷고 있는 아모스와 프란체스카. 여전히 더운 날씨를 고려해서 내일은 더 일찍 출발하기로 약속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 4시 기상, 4시반 출발 예정. 그러나 늦게까지 맥주와 와인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12시에 잠이 들어 약속대로 출발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우리 모두는 정확히 4시에 눈을 떴다. 짐을 챙기고 음료수 자판기에서 주스를 뽑아 마시고 출발한다. 여전히 한밤중이다. 까만 하늘에 단추같은 달만이 떠 있다.


오늘은 20킬로 떨어져 있는 게르니카(Guernica)까지 걷기로 했다. 게르니카하면 떠오르는 건 피카소의 그림이다. 그 그림의 배경이 되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는 잘 몰랐다. 바스크 지방에 속해 있는 작은 도시 게르니카. 1937년 독일 나치군이 무기 테스트를 위해 이 작은 도시에 엄청난 폭격을 가해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곳. 오늘 걸어서 바로 그 곳까지 간다.

아직까지 발과 발목이 아픈 나는 아모스와 프란체스카와 속도를 맞춰서 걷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둘은 앞서 걷다가 내가 조금 더 뒤쳐지면 속도를 늦추거나 물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며 나를 기다리곤 했다. 물론 프란체스카도 발목이 아파 천천히 걷긴 하지만, 그녀의 짐보다 내 짐이 더 무거워서인지 내가 항상 꼴찌다. 항상 고마운 그들이지만, 그들의 배려가 조금 부담스러운 순간도 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무리를 하려고 한다거나, 자꾸 속도를 맞추려고 하면 할수록 어깨와 발의 통증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숨이 턱에 차올라 호흡이 힘들 때도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것인지…나는 그들의 동행이 조금씩 버거워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같이 걷게 될까. 가다가 점심은 같이 먹어야 하나, 나 혼자 먹으며 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등등.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싫다. 많은 도움을 받았고 지금도 나를 배려해서 함께 걷고 있는 그들인데 말이다.


일주일 넘게 쉼없이 매일 무리해서 걷고 있다. 몸도 지치고 발과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계속 아프다. 아무튼 오늘 게르니카에 도착하면 쉬면서 생각해봐야겠다. 하루를 쉬어 속도를 늦출지, 아니면 이 북쪽길을 그만 걷고 프랑스길로 돌아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점심즈음 저 멀리 게르니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당도했다. 아모스와 프란체스카는 담배를 피우며 숨을 가다듬고 나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땀을 식힌다. 

순례자 숙소를 찾아 가보니, 이곳은 호스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다른 지역보다 가격이 두세배 비싸다. 문도 4시나 되어야 연다고 하니 아직 두세시간 남았다. 이미 숙소 앞에는 몇몇 순례자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일인당 25유로면 좀 비싼거 같은데?!’

‘그치. 둘이면 50유로인데 그 정도면 호텔도 구할 수 있겠는걸.’

‘관광안내소 가서 다른 숙소를 좀 더 알아볼까?’


시간도 꽤 남았고, 알아봐서 나쁠 것도 없다 싶어 우리는 관광 안내소로 향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게르니카 참상으로 널리 알려진 도시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관광안내소에 물어보니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적당한 가격의 펜션을 추천해 준다. 조금 더 비싸지만, 기다릴 필요도 없고 하루 편히 쉴 수 있으니 오늘은 펜션에서 묵기로 한다. 관광 안내소에서 알려준대로 아담한 건물에 깔끔한 방, 꼭대기 층은 부엌과 야외 테라스가 있는 곳이다. 


오랫만에 가져보는 혼자만의 시간. 아모스와 프란체스카도 이 펜션에서 머물기로 결정하고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짧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어제처럼, 또는 그제처럼 우리는 이따 저녁에, 아니면 내일 길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써 만나려하지 않아도, 약속하지 않아도 되는 만남이 이 순레자길 위에서의 인연이므로. 하지만 그 로비에서의 헤어짐 이후, 난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작은 마을을 몇바퀴 돌았지만,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과 속도를 맞추며 조금 힘겨워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난 걷는 내내 그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했다. 


Distance: Ziortza – Gernica (20km) 
Time for walking:  4:30 am – 12:30 pm 
Stay: Pension
A thing to throw away: 소지품 파우치 (배낭 안을 좀 더 잘 정리하고자 몇개의 파우치를 사왔다. 초경량 파우치 몇개와 천으로 만들어진 일반 파우치. 큰 무게는 나가지 않지만, 초경량 파우치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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