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오늘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제 부르고스에 도착해 하루를 지냈을 뿐인데, 높은 기온과 뜨거운 태양에 더위를 먹은 듯했다. 오후에 잠시 동네 구경을 했을 뿐인데도 그 정도니, 하루 종일 걷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 같아 그 어느때보다 일찍 일어나 길을 나선다. 그리고 프랑스길로 돌아와서 첫날이니만큼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오늘 주어진 일정 20킬로만 걷기로 마음 먹는다. 날씨에 따라, 몸 상태에 따라 20킬로는 걸을 만할 수도 있고, 죽도록 힘들 수도 있다.
일어난 시간은 새벽 4시. 오전 10시만 되어도 이글거리는 태양에 눈을 뜰 수가 없는 이 곳. 그 뜨거움은 말할 것도 없으니 어두워도 새벽에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걷는 속도는 빨라야 시속 3킬로, 20킬로면 7시간쯤 걸어야 하는 거리다. 조용히 배낭을 챙겨 나오려는데 순례자 숙소 문을 밖에서 잠궈 놔서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침 6시가 되어야 문을 열어준다는 걸 미처 몰랐다.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렇게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나. 나처럼 일찍 나서려던 사람들 몇몇이 문을 열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본다. 순례자 숙소는 보통 밤 10시에 문을 닫고 아침 8시 전에 모두 나가야한다. 근데 이렇게 안에서 문을 쉽게 열수 없는 숙소는 처음이다. 결국 5시가 조금 넘어서야 비상문을 통해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아직도 밖은 깜깜하다. 노란 화살표를 잘 찾아야 한다. 내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걷고 있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긴 할아버지의 걸음이 엄청나게 빠르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듯 여기저기 둘러 보지도 않고 곧장 앞만 보고 걸어간다. 나는 할아버지를 놓칠세라 빠른 걸음으로 쫓아간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저 멀리서 뿌옇게 하늘이 밝아져 온다.
오늘부터 걷는 길, 앞으로 200킬로는 메세타 고원을 지나는 길이다. 부르고스 (Burgos)에서 레온(León)까지인 이 고원지대는 해발 700-800미터다. 평야처럼 펼쳐지는 땅, 건조하고 척박한 땅. 강렬한 태양만이 하루종일 내리쪼이는 땅. 끝도 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땅.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는 땅. 파란 표지판, 노란 화살표와 조개만이 눈에 띄는 땅.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 건조한 날씨, 황토빛 평야가 사막처럼 펼쳐진다. 그 사막은 모래 대신 밀밭으로 채워져 있다. 이미 탈곡을 마치고 밀밭은 짧은 스포츠 머리처럼 깍여져 있다. 그리고 남은 밀대는 사각형 모양으로 정갈하게 묶여 미술관 앞 벤치처럼 언덕 중간중간에 멋스럽게 놓여있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땅. 주변에 마을도, 집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 저렇게 가지런히 밀밭을 가꾸는 사람들은 누굴까.
순례자 숙소에서 함께 묵은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줄지어 걷던 길이었는데, 이곳에 들어서니 하나의 점처럼 저 멀리 한둘이 보일뿐. 사람도 살아있는 다른 생명체도 눈에 띄지 않는 곳. 갑자기 다른 행성에 떨어진 기분이다. 혼자다. 그러나 걷다 보면 혼자가 아닌 걸 느낀다. 혼자 걸었을 수많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무더기, 그 위에 가지런히 얹어져 있는 순례자의 등산화. 다들 외로웠을 것이다. 다들 힘들었을 것이다. 다들 이 길의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진채 한발 한발 내딛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거운 등산화, 물집 잡힌 발가락, 결려오는 어깨와 흘러내리는 땀, 지평선 넘어까지 이어지는 길. 모두 고독했을 것이다. 한짝의 버려진 신발처럼. 걷다보면 나 혼자만 걷고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누군가 앞서 걸었던 이 길, 그리고 내 뒤에 누군가가 따라올 길. 길이 헤깔리면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나뭇가지나 돌로 방향을 표시해 놓는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길이기에.
좀 더 지나자 길 양편으로 해바라기밭이 끝도없이 펼쳐진다. 푸른 잎새에 큰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 있고, 아직 머리가 그렇게 크지 않은 어린 해바라기들은 해를 향해 활짝 얼굴을 들고 서 있다. 어린시절 동네에 핀 몇송이 해바라기를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수만 수십만 송이 해바라기를 본 적이 없다. 노란 들판이 장관을 이룬다.
며칠전 한 마을에서 해바라기씨를 한봉지 샀다. 땅콩처럼 껍질을 까먹는 해바라기씨. 껍질째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거려 알맹이를 골라먹고 껍질을 ‘퉤’하고 땅에 뱉어내는 해바라기씨. 고소하고 적당하게 짭조름한 내가 먹고 있는 해바라기씨가 바로 이곳에서 재배된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강렬한 태양아래 온종일 그 해를 마주하고 무거운 머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가느다란 몸줄기. 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그 씨앗은 저 태양을 견뎌낸 것이구나. 그러니 그 안에 담긴 태양의 에너지와 해바라기생명의 에너지, 그리고 이 척박하지만 광활한 토양의 에너지가 응축된 씨앗. 1유로에 그 모든 에너지를 우물우물 삼키고 있다.
Hornollis de Camino라는 작은 마을은 오늘 일정의 종착 지점이다. 새벽 5시에 출발해서 11시쯤 도착했으니 6시간을 걸었다. 도착해서 순례자 숙소 앞에 가보니, 아직 아무도 없다. 내가 일등으로 도착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나와 비슷하게 출발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숙소까지 게속 걸어간다. 10킬로쯤 가면 다음 숙소가 나오고, 아직 11시밖에 안되었으니 두세시간은 더 걸어가도 괜찮다. 하지만 난 오늘 이곳에서 묵기로 한다. 이미 20킬로를 걸어왔고, 이런 무더운 날씨에 무리해서 좋을 게 없다. 앞으로 열흘 정도는 이 고원 지대를 걸어야 한다. 덥고 메마르고 바람부는 땅.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걸을 것이다.
오래된 성당 바로 옆 순례자 숙소가 있다. 성당만큼 오래된 돌 건물. 오래전 수도자들이 살았었을 것 같은 건물이다. 12시가 되면 숙소 문을 연다고 씌여있다. 가방을 문앞에 세워두고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른다. 이삼십분이 지나자 다른 순례자들이 하나둘 도착한다. 그리고 12시에 숙소 문이 열리고, 배정받은 침대에 짐을 풀어놓는다. 아주 오래된 돌건물, 돌건물이 아니고서는 하루종일 내리쬐는 이 태양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마을 길도 건물도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일찍 숙소에 도착한 건 처음이다. 샤워를 마치고 어제 산 빵과 살라미, 치즈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나도 현지 사람들처럼 씨에스타, 낮잠을 한시간쯤 자고 일어났다. 오늘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느라 충분히 자지 못했다. 며칠 몸이 피곤했는지 입술도 부르텄다. 깨어나니 몸이 훨씬 가뿐하다. 여전히 태양은 뜨겁다. 저녁 7-8시는 되어야 더위가 조금 걷어지고, 사람들이 활동하기 좋은 날씨가 된다. 고지대의 대륙성 기후라서 늦은 밤엔 기온이 꽤 내려간다. 아침에도 제법 싸늘하다. 각 나라의 풍습, 문화는 겪어봐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낮잠을 왜 자는지, 왜 상점들은 2시만 되면 문을 모두 닫아서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지, 시에스타 후 5시쯤 다시 문을 열어 두세시간 후에 하루를 마치는 이들의 일과를, 이제야 나도 온전히 이해한다. 그리고 나도 어느새 그들처럼 살고 있다. 언제 나가서 물과 과일을 사야하는지, 저녁은 언제 먹으러 가야하는지 몸으로 체험하면서 받아들인다. 더이상 오후의 진공같은 시간을 불평하지 않는다.
일어나서 동네 구경을 나선다. 동네라고 해봤자 일이백미터 남짓한 길이 전부다. 양쪽으로 돌로 지은 건물 몇채와 카페와 레스토랑 겸 바인 가게가 한개, 그리고 간출한 수퍼마켓 하나. 과일 서너가지, 물, 종이팩에 담긴 주스 몇통, 초코렛 등 과자 한두상자가 전부인 그런 가게. 순례자들은 하나뿐인 바의 파라솔 아래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를 마시거나, 순례자 숙소 거실에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보거나, 체스를 두거나, 일기를 쓰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이 더운 늦은 오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순례자 숙소 맞은편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돌로 지은 오래된 성당.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들어서니 한 순례자가 앉아 있다. 성당 정면 앞에는 마리아상 대신 야고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순례자를 위한 성당 같다. 무척 편안하다. 까만 민소매 셔츠, 까만 문신이 새겨진 팔뚝, 까무잡잡한 피부에 커트머리, 단단한 체격의 그녀는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을까. 무사히 이 길을 끝마치게 해달라는 기도일까.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한 기도일까. 미동도 없이 그녀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을은 한적했고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마을에는 순례자들의 발길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는 태양마저도 강렬한 이곳, 그 태양 아래 부지런히 밀밭을 가꾸는 촌부의 모습이 보인다. 평생 단 한번이라도 이 마을을 벗어난 적이 있었을까. 낯선 이들의 발걸음을 이들은 불편해할까. 아니면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는다고 좋아할까. 오늘따라 내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너무나 작은 이 마을에서 내 발걸음의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조용조용히 내 존재가 들키지 않을만큼의 흔적만을 남기고 떠난다.
Distance: Burgos – Hornillos de Camino (20km)
Time for walking: 5:00 am – 11:00 am
Stay: 공립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우산 (작은 사이즈의 삼단 접이식 우산, 가볍고 휴대하기 편리해서 들고왔지만 사용한 적이 없다. 건조한 메세타 고원지대에 비가 내릴 일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