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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13.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18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18 


메세타 고원지대에는 시선을 가리는 숲이나 나무가 거의 없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밀밭과 해바라기밭, 그 사이에 난 하얀 길.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지구의 움직임을 좀 더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군더더기 없는 지구라는 땅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곳. 이른 새벽 하늘에 촘촘히 수놓인 수많은 별도, 해가 뜨는 순간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도 아무런 방해없이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지구가 조금씩 돌아가면서 만들어내는 그림자 길이의 변화 또한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이십일이 되어간다. 약간의 불면증과 새벽에 잠들던 습관이 이곳에 와서는 사라졌다. 새벽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새벽까지 깨어있다보면 내 감정에 빠져버리기나, 너무 많은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우울해지기 쉽다. 여기서는 더운 날씨 때문에라도 일찍 일어나 걷기 때문에 일찍 잠든다. 오후 한두시가 넘으면 걷는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햇볕이 뜨겁다. 처음 며칠은 일찍 일어나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그런데 오늘은 5시반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무슨 일이든 습관이 되기까지는 이주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메세타 고원지대, 이곳은 밀밭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언덕과 평야로 이루어진 곳이다. 해발 700-800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 끝없이 펼쳐지는 땅. 지금은 한여름인데도, 풍경은 한국의 가을 들녘 같다. 추수를 이미 끝낸 황금색 밀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그 사이사이 노랑, 연두, 녹색의 해바라기 밭으로 더 알록달록해진다. 뜨거운 햇살과 가을 풍경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다. 한국의 농촌처럼 시골집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연 속에서 저절로 가꾸어진듯한 들녘과 꽃밭. 그 사이에 길고 가늘게 난 길을 따라 몇시간째 걷고 있다. 

 

십킬로쯤 걸으니 작은 마을이 나온다. 순례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늦은 아침 식사를 하기도 하고, 커피한잔을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른다. 나도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계란찜같이 생긴 것과 함께 먹는 바게뜨, 그리고 카페 콘라체. 옆 테이블에 앉은 한 가족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 내 앞에 가던 작은 아이의 가족이다. 앞서 걷던 남자 아이는 열살쯤 되어보였다. 그런데 자기 몸체만한 배낭을 메고, 챙이 넓은 모자까지 야무지게 쓰고 씩씩하게 걷던 아이였다. 내가 만난 순례자 중에 가장 어린 친구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800킬로를 걸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아이는 나보다 훨씬 잘 걷고 있었다. 자녀 세명을 데리고 이 길을 걷고 있는 그 아이의 엄마가 내게 다가와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인상좋은 아빠 엄마와, 한참 말 안들을 것 같은 사춘기 소녀 둘과 막내인 그 아이. 독일에서 온 가족 다섯명이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이들은 가족이지만, 따로 걷는다. 걷는 속도가 다르니 당연할 터. 그리고 어느 지점, 앞서 걷던 사람이 잠시 쉬면서 그 뒤에 오는 다른 가족을 기다린다. 하지만 같은 곳을 향해 걷는 가족이 있어 그 아이도 혼자 걷지만 두려움없이 씩씩하게 걸어간다. 애써 속도를 맞춰 같이 걸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걸어 오는 것을 끈기있게 기다려 주는 것, 이 부모의 깊은 배려와 사랑이 전해진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순례자길. 유럽인들이 주를 이루고, 간혹 미국이나 캐나다, 또는 동양인들을 볼 수 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각 나라마다 갖는 특성들이 보인다. 내가 만난 몇명에 기반한 생각이니 일반화시키긴 어렵겠지만,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사고하고 또 결론지으며 산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상식이라는 것은 편의상 사용하는 다수결의 법칙처럼 다수의 생각의 귀결일 뿐 전적으로 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개인성을 압도하는 상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나서 인사만 나눠도 흐뭇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대면에서부터 얼굴이 찌뿌려지는 행동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도 있다. 기숙사 형태의 숙소이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보다 행동거지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큰 소리로 떠든다든지, 숙소에 있는 물건들을 자기 물건인양 함부로 다룬다던지, 속옷만 입고 돌아다닌다던지, 큰 배낭을 옆자리까지 펼쳐 놓는다든지, 욕실을 혼자 너무 오래 쓴다든지,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판단을 해버리고 만다. 


어제 독일에서 온 대학생으로 보이는 친구가, 숙소 한켠에서 찬물에 발을 담구고 있던 내게 다가와 다짜고짜 내 노트북를 한시간만 빌려달라고 했다. 아까 거실에서 내가 노트북을 쓰고 있는 걸 봤다면서. 사실 난 그 친구를 본 기억이 없다. 마주친 적이 없어 인사를 나눈 기억도 없다. 자신의 사진을 외장하드에 옮겨야 하는데 숙소에 공용 컴퓨터가 없어서 내 컴퓨터를 빌려달라는 것이다. 조금 황당했다. 인사 한마디 없이, 조심스러운 기색도 없이 너무 당연한 듯한 태도가 무례하게 느껴졌다. 자기가 필요하면 무조건 상대방이 들어줘야하는 한다는 식의 태도였다. 수퍼마켓을 다녀와서 쓰면 좋겠다며 괜찮겠냐고 묻는다. 나는 순간 뭐라 대답할지 몰라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나 또한 일기도 써야하고 사진도 옮겨야 하는 등 컴퓨터를 쓸 일이 있었다. 또한 내 노트북을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서 내주는 게 맘에 걸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았다. 가만 그녀의 얼굴을 되짚어 생각하니 누군지 기억이 났다. 오후에 다들 낮잠을 자고 있는데, 숙소 문 앞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친구랑 큰 목소리로 수다를 떨던 친구다. 그때도 여러 사람이 머무는 곳에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그들이 무례하다 여겼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길 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길을 물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시간을 내서 손수 그 앞에까지 데려다 주는 사람들, 어디가 아프면 성심 성의껏 조언을 해주거나 약을 빌려주는 사람들, 육체적으로 힘이 들 때면 힘내라는 인사를 건네주는 사람들. 그런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누군가 요청한 지금, 난 머뭇거리고 있다. 내 기준에 그녀가 무례하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놀다가 그 친구는 늦게 숙소로 돌아왔고, 소등 전에 내게 와서 다시 부탁하는 일은 없었다.


이 길 위에서는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것은 아니어도 누군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가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행군하듯 걸어갈 때면 혼자서 걷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앞뒤에 같이 걷는 사람들이 있기에 길을 잠시 잘못 들어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게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함께 걷고 있는 길, 그것이 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그래서였을까. 어젯밤, 그리고 오늘 걷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상대방에 대한 내 판단에 따라 도음을 주고 안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물론 내가 직접 거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이미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친구가 다시 부탁해서 마지못해 빌려줬다고 해도 진정한 도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섣부른 판단이나 조건없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도움과 친절을 베푸는 것. 내 협소한 생각으로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오늘 머물 숙소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기꺼이 내 컴퓨터를 빌려주리라 마음 먹는다.

 

순례자길을 횡단하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길도 다양하지만, 가는 방법도 다양하다. 옛날처럼 말을 타고 가는 사람도 있고, 당나귀에 짐을 싣고 가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두발로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많다. 800킬로니 자전거로는 열흘정 도면 끝마칠 수 있는 거리다. 걸어서는 40일. 차나 기차로 간다면 하루면 가 닿을 거리다.


땡볕아래 무거운 가방을 메고 헉헉거리며 걸어가고 있노라면, 씽씽 지나가는 자전거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무거운 짐도 뒷자리에 싣고 가니, 어깨도 안 아플 것이고 발이며 발목에 무리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부러워하다가도, 높은 언덕을 올라가거나 산을 타야할 경우에는, 걸어가고 있는게 다행이라 생각된다. 정말 사력을 다해 페달을 밟아도 걷는 것보다 느린 매우 급한 경사면이나 자전거로 갈 수 없는 길도 종종 마주친다. 그럴 때는 자전거를 등에 메든 끌든 어쨌든 데리고 가야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자전거로 좀 더 빨리 갈 수는 있지만, 그 만큼 볼 수 있는 풍경은 줄어든다. 속도와 내 시야의 폭은 반비례한다. 그래서 빨라진 속도만큼 덜 보게 된다. 걷는 것도 마찬가지. 빨리 걸으면 주변의 풍경은 줄어든다. 천천히 걸으면 느리지만 더 많은 걸 보고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걷는 속도를 자꾸 생각한다는 건, 속도에 이미 내가 민감해져 있다는 말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끝마쳐야하는 것도 아닌데 걷는 속도를 계산한다는 것은, 짜여져 있는 일정표나 계획, 시간, 거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속도와 비교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지표와 비교하며 나 스스로를 점검하는 거야 나쁘지 않다지만, 지나치게 그것을 의식하다보면 내 속도가 조금 빨라도, 조금 느려도 불안해진다. 남보다 느린 내 속도를 위안하기 위함이 아닌, 남보다 느린 것에 대한 패배감에서가 아닌, 온전히 내 걸음의 속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조급해하지 않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근데 또 걸어보면 안다. 아무리 마음이 앞서가도 내 발과 몸을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나이는 몸보다 머리로 앞서 먹는다. 내가 20대였을 때, 30, 40대 선배들을 보면서 그 나이의 나를 상상하곤 했다. 어른스럽게 보이지만 때론 무기력해보이기도 했던 인생 중반의 나이.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여전히 한없이 미성숙한 내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다. 여전히 난 방황하고 상처받기 쉬운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간이 성장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제까지의 내가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 위에 새로운 옷을 덧입는 것이다.  옷의 스타일과 색깔에 따라 조금 달라져 보일 뿐 그 옷차림 안의 나는 변함없다. 그래서 나이가 먹어도 어릴 적의 내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일이다. 


안토니오 할아버지 얼굴에도 수십년 전의 그의 모습이 얼핏얼핏 보인다. 이탈리아에서 온 그는 작년에 이어 이 길을 두번째 걷는다고 했다. 70세가 훌쩍 넘어보이지만, 그의 얼굴과 눈빛에는 젊은 시절의 열정이 서려 있다. 젊은이 못지 않은 속도로 하루하루 걷고 있는 그는 작년에 걸었던 이야기를 해준다. 체력은 젊은 시절 같지 않겠지만, 그가 매일 적고 있는 작은 노트에 담긴 빼곡한 그의 글씨는 그의 꼼꼼함과 섬세함, 그렇게 평생을 살았을 그의 과거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나보다 앞서 인생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면, 때론 지금의 내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60,70세가 되어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여전히 생각하고 고민한다는 것. 어른이 된다고 어린시절의 혼란과 방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죽는 순간까지 같은 고민을 부여잡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함께 걷는 사람들의 삶을 엿보며 깨닫는다. 

 

Distance: Hornollis – Catroleriz (20km) 
Time for walking:  6:00 am – 12:00 pm
Stay: 사설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산티아고 북쪽길 가이드북과 숙소 정보 책자 (잘 정리된 북쪽길에 대한 안내 책자 두권. 내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어 기념으로라도 꼭 간직하고 싶었지만, 묵직해서 고민 끝에 숙소에 남겨두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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