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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May 11.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1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1


첫날이다. 늦게 일어났다. 다들 새벽같이 출발한다는데, 새벽녘에 잠이 들어8시에 일어났으니 부지런히 출발해야 한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첫날 걸어야할 거리는 27km다. 순례자길 안내 사무소에서 가이드해 주는 거리가 그렇다는 것이지, 꼭 그만큼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순례자 숙소가 일정 거리를 가야 있기 때문에 시간과 거리를 잘 가늠해서 걸어야 한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처럼 정해진 일정을 따라 걸으면 좋은 점도 있다. 그날 그날 할당된 거리를 걸어가기만 하면 되고, 일정표 상의 도착 지점 마을에는 대개 규모가 큰 순례자 숙소가 있어서 숙소 구하기가 수월하다. 또한 그 일정에 맞춰 걷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과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자신의 컨디션에 맞춰서 걷는 것이다. 하루이틀 욕심내서 걷다가 발이나 다리에 무리가 가면 며칠을 쉬어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살피며 그날 그날의 일정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이다.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걸을 생각이다. 빨리 걷고, 빨리 도달하고,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것에 익숙한 나를 리셋하고 싶기도 하고, 빨리 걷고 싶다 한들, 남들보다 빨리 걷기도 어렵다. 서구인들의 긴 다리를 갖지 못했고, 다쳤던 발 때문에도 무리해서 걸을 수 없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오늘 27km를 다 걸을 생각은 없다. 안내 사무소에서 받은 숙소 리스트를 훑어 보니, 10km 지점에 오리손 (Orison) 산장이라는 숙소가 하나 있고, 그 이후로는 나머지17km를 다 걸어야 다음 숙소가 나온다. 그러니 10km 지점에서 오늘 하루를 묵고, 내일 나머지 17km를 가면 되겠다. 

첫날이니 쉬운 코스부터 시작하면 좋으련만,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하는 프랑스길의 첫날 코스는 해발 1500m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가장 힘든 코스 중 하나다. 산맥을 넘는 두가지 길이 있는데, 조금 더 힘들지만 최고의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A길과 중간에 도로를 따라 걸을 수 있어 조금 덜 힘든 B길. 나는 A 코스를 선택한다. 이곳에서 조금 더 힘들고 덜 힘들고의 차이가 얼마만큼일지 짐작하기도 어렵거니와, 힘들기 때문에 피할 거라면 애초에 이곳에 올 이유가 없다. 


어제 내린 비로 청명하게 개어 있는 하늘 아래,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나의 커다란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어제 저녁 마을에서 본 순례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미 다들 떠난 모양이다. 


마을을 막 벗어나려는데 어제 생장피에드포르로 오던 작은 기차 안에서 만난 베티가 길 한켠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그녀는 벨기에에서 온 55세 네 아이의 엄마다. 이미 큰 아이가 36살, 16명의 손자가 있고, 아프리카 어린 아이들을 돕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그녀는 에너지가 넘친다. 기차 맞은 편에 앉았을 때부터 그랬다. 눈인사 정도 하는 경우와는 달리, 내 가방과 복장을 보고 여러가지 질문을 건넨다. 


‘어디에서 왔어요? 처음인가요?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하나봐요.’

‘네…’

‘나는 이번이 세번째라우. 전에 친구들과 왔었는데 혼자 오는 건 처음이라 기대도 되고 긴장도 되고 그러네.’

‘세번째라니, 정말 좋으셨나 보네요.’

‘그럼 좋았지. 이번에는 60일 정도 생각하고 왔어. 지난 일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걷는 연습을 했지. 무릎이 안 좋거든. 지난번엔 친구들과 캠핑카로 왔었기에 많이 걸을 필요가 없었지. 혼자서 잘 걸어낼 수 있을지 걱정이야.’

‘그렇게 오래 준비하셨으면 충분히 가능하실 것 같은데요.’

‘내가 몸 담고 있는 단체에서 후원을 받아 온 거라서 끝까지 잘 마치고 싶어. 나를 후원해 준 사람들을 실망시킬 순 없지. 내가 걷는 이 길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거든.’


그녀는 그녀의 몸집만한 연두색 가방에서 자잘한 글씨로 빼곡히 정리한 노트며 자료들을 꺼내서 보여준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읽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책 한권, 여행을 떠나기 직전 구입한 배낭과 등산화, 그리고 지난 한달간 러시아를 여행하며 매일 대여섯 시간씩 걸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녀가 건넨, 빼곡히 적힌 정보들에 눈이 가지 않는다. 지명이나 숙소의 위치, 비상 연락처 등 알고 있으면 유용할 정보들이지만, 미리 그것들을 숙지한다고 해서 내가 이 길을 더 잘 걸어낼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준비성이 철저한 편이지만, 여행을 한다거나, 낯선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갈 때면, 오히려 별 준비를 하지 않는다.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 찾아보고 떠날 뿐. 지도를 보며 머리로 길을 익히는 것과 직접 가서 두발로 걸어보는 것, 여행과 삶은 후자다. 습득된 정보는 머리 속에 어떤 틀을 형성하고, 그 틀은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을 통제하곤 한다. 조금 불편을 겪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싶다.  


늦은 아침, 그녀와 함께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중간에 걸음 속도가 달라서 헤어지긴 했지만, 어디선가 다시 만날거라는 걸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말로만 듣던 피레네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깨끗함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맑은 공기, 푸른 잔디와 나무, 그리고 잔디 위를 느릿하게 서성이는 소와 말, 양떼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푸른 산맥의 줄기들이 저 멀리 펼쳐진다. 그 위에 걸쳐진 하얀 구름들은 자잘한 그림자를 산 위에 드리우고, 그 사이사이 햇살이 깃든다. 숨을 헉헉 내쉬며 천천히 산을 오른다. 가방은 엄청난 무게로 내 어깨를 짓누르고 땀은 비오듯 흐르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모든 것이 그저 ‘괜찮다’라는 생각뿐이다.


서너시간 걸어 오후 한시쯤 오리손 산장에 도착했다. 해발 800m에 위치한 이 산장은, 주변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 하루 묵어가기에 좋다. 어제 저녁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마주친 몇몇 사람들이 산장 밖 테이블에 삼삼오오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몇마디 인사를 나눈 후, 산장 안으로 들어가 여주인에게 숙소에 자리가 있냐고 물으니, ‘컴플리또’란다. 이제 겨우 1시인데 30여개의 자리가 모두 다 찼다는 것이다. 땀은 이미 비오듯하고 한여름 스페인의 태양은 뜨거울대로 뜨거워진 상태, 17km를 더 걸어가야 다음 숙소가 있으니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다시 가방을 들쳐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남은 17km를 다 걸어가야 한다. 맥주 한잔 마시고 갈 여유도 없다. 몇모금의 물을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난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과연 난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첫날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여유있게 첫날을 시작하고팠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여름이라 해가 늦게 진다고 해도, 17km면 내 걸음으로는 최소한 6-7시간은 더 걸어가야 한다. 더구나 계속 오르막 길인데다, 첫날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발과 다리, 어깨가 묵직하게 아파온다. 그래도 앞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오늘 당도해야 하는 곳은 첫날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다. 피레네 산맥을 오르다보면 중간쯤에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국경을 넘어 십킬로쯤 더 걸으면 도착하게 되는 론세스바예스는 스페인의 동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지만, 넘기 힘든 피레네 산맥을 피해 순례를 시작하고자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해발 천미터가 넘자, 날씨가 갑작스레 쌀쌀해진다. 바람이 불고, 하늘에 구름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두세시간을 더 걷고 나자, 저 앞 언덕 위에 흰색 봉고차 한대가 서 있고, 그 앞에 천막이 쳐져 있다. 프랑스에서 순례자 여권 (순례자 안내 사무소에서 발급해 주는 도톰한 하얀색 종이, 이 순례자 여권이 있어야 순례자 숙소에서 묵을 수 있다) 에 스탬프(순례자 숙소나 레스토랑에서 찍어주는 도장)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고 적힌 화이트 보드가 눈에 띈다. 천막을 지키고 서 있는 아저씨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삶은 달걀과 커피, 에너지바 등이 올려져 있다. 출출하기도 하고, 날도 추워져 삶은 달걀과 커피 한잔을 마신다.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요.’

‘오늘 아홉번째야.’

‘뭐가요?’

‘한국 사람이 자네까지 포함해 아홉 명이 이 지점을 통과했다는 말일세.’


화이트 보드에는 여러나라의 이름과 각각 몇명이 지나갔는지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아저씨 말대로 나를 앞서 지나간 한국인들은 오늘 모두 8명. 


‘이 높은 산까지 매일 올라오시나요?’

‘응 그렇지. 조금 있다가 마을로 내려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가지고 내일 새벽 다시 올라올거야.’

‘순례자들을 위한 단체에서 일하시는 건가요?’

‘아니, 나는 그냥 혼자 하고 있는 거야. 이곳이 좋아서…’


여행을 좋아하던 그가 은퇴 후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매일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순례자들에게 앞으로 걸어가게 될 길에 대한 짧막한 설명과 함께 스탬프를 찍어주는 일, 그리고 간단한 간식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일이 그의 일상이었다. 


‘지루하지는 않으세요? 하루종일 이 차 안에서 지내시는거요.’

‘지루하지 않아. 자연의 품 속에서 지내니, 포근하지. 매순간 바뀌는 저 하늘을 보게나.’


그에게 가족이 있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지만, 어떤 사연으로 혼자 이곳에 머무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는 내일도 어김없이 달걀 한판을 삶아서 이곳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내일도 이 길을 지나는 많은 순례자들에게 남은 거리를 설명해 주고 론세스바예스까지 서너시간은 더 가야한다는 말을 반복할 것이다. 


기운을 내서 한두시간 더 걸으니, 론세스바예스라는 사인이 크게 보인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 모양이다. 그 사인 앞에서 사진 한장을 찍고 서둘러 걷는다. 근데 좀 더 가다보니, 순례자길 사인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어떤 길로 가라는건지 헤깔리기 시작한다. 안내 사무소에서 설명해준대로 노란 화살표, 그리고 하얀색과 빨간색 페인트로 두줄 그어진 사인을 보고 따라가고 있는데, 길이 여러 방향으로 나뉘어지고 방향 표시도 명확하지 않다.


이 길이 맞나 싶어 여러번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만,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대답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커플에게 물어보니 온 길을 되돌아가야한다는 손짓을 한다. 이상하다…분명히 순례자길 사인을 따라 왔는데 왜 돌아가라고 하는건지 모르겠다. 불안한 마음으로 계속 걸어가는데, 큰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내 걸음이 느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왠지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하지만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걸어왔고, 또 잊을 만하면 순례자길 사인이 나타나니 아예 잘못 든 길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아까 봉고차 아저씨가 말해준 십킬로는 더 걸었음직한데 론세스바예스가 곧 나온다는 표지판은 보이질 않는다. 모르는 지명들만 계속 나오고, 시간은 저녁 6시가 넘었다. 이제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산중, 저 멀리 마굿간이 하나 보일뿐 그 어디에도 마을의 모습은 없다. 첫날부터 깊은 산중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난다. 내 두발로 어둠이 찾아오기 전까지 걸을 수 있는 거리는 5킬로 남짓. 그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이 숲 속에서 밤을 지새야 한다고 생각하니, 갖가지 산짐승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날씨도 쌀쌀해져 산속 밤기온이 얼마나 더 떨어질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가진 두꺼운 옷은 지금 입고 있는 바람막이 잠바가 전부인데...그렇게 길 한가운데 망연자실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차소리가 나서 뒤돌아 보니 하얀색의 낡은 픽업 트럭이 속도를 늦추더니 내 옆에 섰다.


‘순례자인가요?’

‘네…’

‘어디로 가려고 하나요?’

‘론세스바예스요.’

‘길을 잘못 들었군요.’

‘네?!’

‘이쪽으로 가면 한참을 돌아가야 합니다. 이 시간에 이 길로 계속 걷다가는 한밤중이나 되어야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할 거에요.’


알이 작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머리숱이 적은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다. 걱정스런 말투로 서툰 영어를 써가며 내게 건넨 그의 말들이 사실인지 알 길이 없다. 답답했던지 내가 들고 있던 작은 지도를 가져가서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곳은 제가 아까 지나온 곳이거든요.’


안타깝게도 정확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겨우 알아들은 얘기는, 자신의 차로 가까운 숙소까지 데려다 준다는 것이다.


‘이 근처에 순례자 숙소가 있나요?’

‘피레네 산맥 중간 지점에 있는 숙소가 제 집 근처니 거기까지 데려다 줄께요.’

‘제가 아까 지나온 오리손 산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 반대편 쪽에 또다른 순례자 숙소가 있어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곳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두갈래길 중 내가 선택한 A길이 아닌, B길의 중간 지점에 있는 마을에 있는 숙소를 말하는 것이었다. 해는 점점 기울고 있고, 이 아저씨 말고는 길을 물을 사람조차 없는 피레네 산속 어딘가에서 나는 길을 잃은 상황이다. 


순간 모든 것이 공포스럽다. 짙은 선글라스 너머의 그의 눈빛을 살펴볼 수도 없고, 페인트칠이 거의 다 벗겨진 낡은 픽업 트럭의 뒷부분은 가려져 있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혹시 누군가가 숨어있는 건 아닌지 짐작할 수도 없다. 왠지 각종 연장이 가득 들어 있을 것만 같고, 저 트럭에 한 번 올라 타면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 브루스 윌리스를 닮은 이 남성이 갑자기 헐리웃 영화에서 본 시리얼 킬러 같기도 하다.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내가 제대로 알아듣긴 한건지, 왜 가던 길을 멈춰가면서까지 내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저 하얀 픽업 트럭을 타고 과연 난 어디까지 이 남자를 따라가야하는건지 짧은 순간 내 머릿 속에 수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냥 걸어갈께요.’

‘이 산의 지리를 잘 아는게 아니면 이 길을 따라서 론세스바예스까지 찾아가기 어려워요. 그리고 곧 어두워질 거구요.’


여러번 거절했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내가 한참동안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도, 갈 생각을 안하고 계속에서 나를 설득하려는 그가 더 의심스럽다. 


어찌해야할까. 어찌해야할까…


일이분 후, 난 그의 트럭에 앉아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본능에 기대어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순간, 더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그런 순간, 운명이거나 또는 기적이라 믿는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었다.


여전히 불안해하는 내 눈빛을 보았는지, 그는 중간중간 내가 길을 잘못든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설명해 준다. 가까이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착한 음성이다. 내가 상상한 수많은 나쁜 일들을 저지를 수 없는 목소리다. 삼사십분을 차로 더 달렸다. 산을 가로 질러 반대편 마을에 도착했다. 


‘저 앞에 보이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하얀 물탱크가 있는 건물이 보일 거에요. 그곳이 순례자 숙소입니다.’

‘네, 너무 감사해요.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을 뿐입니다. 끝까지 순례 잘 마치길 바래요.’


잠시나마 그를 범죄자로 생각했던 내 마음이 한없이 미안해졌다.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그는 떠났다. 멀어져 가는 그의 트럭을 한참 바라본다. 말로도 눈빛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머릿속에 뒤엉킨다. 두려움과 고마움, 친절과 감사, 공포와 환희, 슬픔과 미안함. 


그는 천사의 부름을 받고 숲속으로 달려온 게 아니었을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적 같았던 그의 도움. 그는 그렇게 내게 구원의 손길을 주고 떠났다. 주위는 푸른색을 띄며 사위어 가고 있었다. 

Distance: 생장피에드포르에서 Valcarlos Luzaide까지 약 25km (피레네 산맥을 넘는 A 코스를 따라 25km쯤 걸었으나, 길을 잃어 차를 얻어 타고 B코스 중간 지점인 Valcarlos Luzaide에 도착)
Time:  9:00 am - 8:30 pm  
Stay: Luzaideko Aterpea Alber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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