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atman May 16.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2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2


오늘은 둘째 날이다. 어제 길도 헤매고 너무 많이 걸은 탓에 조금 늦게 일어났다. 스페인의 여름, 한낮의 태양이 너무 뜨거워 순례자들은 보통 아침 6-7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오후 1-2시쯤 숙소에 도착한 후 샤워하고, 빨래하고, 낮잠 (시에스타)을 자기도 하고, 동네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동네 구경을 하거나, 내일 먹을 아침과 점심 거리를 준비한다. 


일어나보니 아침 8시. 어제 같은 숙소에서 잠을 잔 한나는 이미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부시시 일어나 서둘러 가방을 싼다. 가방을 싸는 것도 아직 익숙하지 않다. 여기저기서 들은 요령대로 짐을 싸본다. 침낭은 배낭 가장 아래 쪽에 넣고, 그 위로 다른 짐들을 차곡차곡 균형을 잡아가며 넣어야 좀 더 편하게 배낭을 멜 수 있다. 무거운 건 위쪽에 넣고, 물이나 먹을 거리는 꺼내기 편한 곳에 넣는다. 꼼꼼히 정리하며 짐을 싸는데 한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리고 어제 준비 못한 점심 거리로 바케뜨와 살라미 조금, 초콜렛과 과일 한두개, 1.5L 생수 한통까지 챙겨넣고 나면, 가방 무게는 10킬로가 넘는다. 이런저린 준비를 마치자 시간은 벌써 10시. 오늘도 나는 가장 느린 출발을 한다. 길을 나서니 이미 뜨거워진 햇볕은 내 머리를 쏘아대기 시작한다.


어제 묵은 숙소는, 피레네 산맥을 넘는 두 갈래 길 중 B코스를 따라 걷다가 프랑스 국경을 지나 스페인으로 넘어오면 만나는 작은 시골 마을에 위치한 곳이었다. 두 나라의 국경을 경계로, 거짓말처럼 산과 구름의 모습이 달라진다. 바람의 결도 다르다. 스페인의 이글거리는 태양은 모든 것을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처럼 강렬하다. 이 태양 아래 자라는 포도와 그 포도로 만든 와인이 맛이 없을 수 없는 이유를 알겠다. 고작 하루를 걸었을 뿐인데, 내 살도 적포도주처럼 빨갛게 익어버렸다. 모든 것을 태워릴 것 같은 그 강렬함이 아름다운 곳이다. 나는 온몸으로 태양을 느끼며 오늘도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다.

오늘은 B코스를 따라 론세스바예스까지 걸어갈 예정이다. 숙소를 나서서 마을을 빠져나가자 숲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길 한켠 나무 상자 안에 바게뜨가 여러개 놓여져 있다. 근처 마을에 사는 누군가가 순례자들을 위해 가져다 놓은 빵이다. 천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길을 기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저 상자 안에 바게뜨를 채워 놓았을 것이다. 난 좀 전에 산 바게뜨가 있어 가져갈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배려와 친절을 마음 속에 담아간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십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순례자길을 찾아온다. 가까운 유럽 국가에서 가장 많이 오지만, 그 외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많이들 온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나눠주는 자료가 한글로 번역되어 있을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 순례자길 800킬로를 온전히 두 다리로 걷는 사람들도 많지만, 자전거로 횡단하는 이들도 많다. 어느 나라에서 왔든, 어떤 언어를 쓰든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웃으며 인사를 주고 받는다. 


‘올라 (Olla)!!’ 

‘부엔 까미노 (Buen Camino)!’


올라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고, 부엔은 ‘좋은’, 까미노는 ‘길’이라는 뜻이다. 끝까지 잘 걸으라는 의미의 인사이자 격려다. 그 길이 길고 험하고 힘든 길임을 서로 알기에 그 인사 한마디가 힘이 된다. 

 

깊고 깊은 산 속, 높은 곳에 서 있으니 모든 것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 구름을, 나무를, 잔디를, 바람을 느낀다.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크고 또렷하게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나뭇잎은 어찌 저렇게 짙은 초록인지, 하늘은 어찌 저리도 푸른지, 말은 왜 그리 윤기가 짜르르 흐르는 황토빛인지. 물감으로 짜낼 수 없는 색깔들, 자연의 색이다. 구름은 솜사탕처럼 뭉쳐졌다가 스르륵 사라진다. 내 눈이 카메라 렌즈가 되어 구름을 잡아당겨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 나빴던 시력을 되찾아 바라보는 듯한 착각. 그렇게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자연도 인간도 내가 다가가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쉬지 않고 7-8시간을 걸을 수는 없다. 평지만 걷는 것도 아니고 험한 오르막 길도 나오고, 땡볕 아래 녹아내리는 듯한 아스팔트 길도 걸어야 하고, 자갈밭, 소똥이 가득한 길, 진흙길 등 다양한 길을 따라 걷는다. 날씨나 몸 컨디션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평지는 40-50분마다 5분에서 10분정도 쉬는 것이 좋다. 오르막길이거나 햇볕이 강해서 땀을 많이 흘리는 경우는 30분마다 5분에 10분정도 쉬면서 물도 마시고, 간단한 간식을 먹으면 체력은 금새 회복된다. 물론 두세시간 안 쉬고 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은 후에는 30분을 쉬어도, 짧게 여러번 쉴때만큼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체력이 아예 바닥나기 전에 조금 힘들다 싶을때 잠깐잠깐씩 쉬어주면 몸이 방전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지만, 막상 걷다보면 욕심이 생기기도 해서 쉽게 멈춰지지 않는다. 내 뒤에 오던 사람들이 추월해 가고, 내가 맨 뒤로 처지기 일쑤니 쉬지 않고 빨리 걸어서 그들보다 먼저 가고 싶은 욕심. 그리고 무엇보다 늦게 도착하면 숙소가 다 차서 어쩌면 수킬로를 더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 두 가지 마음 때문에 중간에 쉴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어제 오늘, 그럴 때마다 멈춰서서 쉬었다. 체력을 위해서였기도 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이 끝도 없이 펼쳐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던 길을 멈춰서서 바라보는 자연의 신비로움. 깊은 산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땀에 흠뻑 젖은 머리가 말라가는 시원함. 입 안에서 사르르 녹고 있는 초콜릿의 달콤함.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부럽지 않은 순간이다. 


급격한 경사의 오르막을 삼십분쯤 헉헉거리고 오르다보면 그 숲의 아름다움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빨리 이 오르막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 하지만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면 서서히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커다란 숲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 몸이 필요로 하는 5분의 휴식. 깊고 고요한 휴식이다. 그렇게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몸의 요구에 반응한다.


몸 뿐만 아니라 나란 존재를 만드는 정신, 마음, 영혼의 요구에는 난 어떻게 반응해 왔던가? 마음과 영혼이 지치고 힘들다고 할 때, 나는 그 메세지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무시하고 그저 숨을 헉헉대며 서너시간을 걷듯, 그렇게 계속 걷기만을 재촉했다. 내가 느꼈던 우울, 불안, 슬픔의 감정들이 내게 건네고자 했던 말들을 외면했다.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르라고, 물도 마시고, 달콤한 초콜릿도 한조각 입에 넣어달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몸과 마음, 정신, 그리고 영혼. 이 모두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걷든 달리든, 아니면 제자리에 서 있든, 인간은 같은 행동을 장시간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쉼을 그저 게으름이나 낭비라고 생각하는 습관은 인생에서 큰 손해다. 부지런하고, 누구보다 먼저 일하기 시작하고, 누구보다도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한국 사람들은 그런 쉼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도 경쟁하듯 걷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하루에 정해진 코스는 꼭 채워야 하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누구보다 먼저 당도해야 안심하는 사람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얻은 휴가가 30일 밖에 안될 수도 있고, 미리 끊어놓은 비행기표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해진 길과 코스가 있지만, 그 시작과 끝은 나에게 달려 있다. 자신의 속도에 맞춰, 주어진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한발한발 천천히 내딛는 지금 이 순간이면 충분하다. 그 시간이 일주일이든, 보름이든, 한달이든 자신이 정한 시간만큼 걸으면 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숙소가 허락되는 한, 걷고 싶은 만큼, 5킬로든 30킬로든, 천천히 걸으며 중간중간 쉬면서 주변을 바라보고 바람을 느끼면서 그렇게 걸을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같이 걷기 시작한 사람들보다 많이 뒤쳐지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학교에서 일등을 하면 좋아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에서 좋기만 한 것은 없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기 마련이다. 일등을 한번 해본 사람은, 다음에 이등을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지는 것을 점점 더 싫어한다. 등수나 점수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된다. 계속 일등을 한다면, 자칫 자만심에 빠지기 쉽다. 설사 일등이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시험성적일뿐인데도 그것이 마치 인생에서 일등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자만에 빠지는 순간,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려는 자세는 수그러든다. 겸손하지 못한 자세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내가 가진 초라한 통나무 배로 바다를 건너려는 꼴이다. 더 튼튼하고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음이다. 꼴찌로 걸으면서 꼴찌의 좋은 점을 알게 된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둘러본다는 말이다. 공부를 못해 꼴찌를 했다면, 분명 다른 무언가, 아니면 여러가지에 관심이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학교에서 꼴찌가 인생에서 꼴찌는 아니라는 말을 한때는 흔히 했었는데, 요즘은 그 말조차 듣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이나 학벌, 사회적 지위, 돈과 명예를 중시한다. 다 일등을 하길 원하고,  또 그것을 한번 얻으면 더더욱 놓지 않으려 기를 쓰며 산다. 그러니 어디 쉴 틈이 있겠는가. 내가 왜 일등을 하고자 하는지, 내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천천히 쉬며 걷다보니 곧 론세스바예스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론세스바예스는 스페인에서 순례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프랑스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순례자들이 모두 거쳐가는 마을이라 규모가 매우 큰 알베르게가 있다. 어림잡아도 400-500명이 묵을 수 있는 규모다. 론세스바예스는 순례자 숙소 이외에도 호스텔과 호텔, 레스토랑과 바도 여럿 있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루이틀 쉬어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오늘 저녁은 숙소 옆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순례자들이 거쳐가는 마을에 있는 바나 레스토랑에는 순례자를 위한 ‘순례자 메뉴’가 있다. 가격은 10-20유로 사이로, 에피타이저, 메인 요리, 그리고 디저트에 와인까지 먹을 수 있는 코스 메뉴다. 아침과 점심을 제대로 챙겨먹기 어렵고, 또 체력 소비가 워낙 많아서 저녁에는 주로 이 푸짐한 순례자 메뉴를 먹는다. 


순례자 메뉴를 먹으려면 보통 6시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 식사 시간은 7-8시 사이. 예약을 미리 해놓고 그 시간에 맞춰서 레스토랑으로 가니 순례자 메뉴를 예약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리를 배정받아 앉으니 내 옆에 한 부부가 마주보고 앉아 있다. 긴 테이블에 쭉 의자가 놓여있어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셈이다. 인상 좋은 부부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어디서 오셨어요?’

‘캐나다 퀘벡주에서 왔고, 이주째 걷고 있다오.’

‘그러세요? 그럼 이미 걷는 게 많이 익숙해지셨겠어요.’

‘모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야 나이가 있으니 무리해서 걷기는 힘들지.’

‘앞으로 얼마나 더 걸을 예정이세요?’

‘글쎄…순례자길은 한달 반쯤 더 걸을 예정이고, 그 이후로는 유럽 여러 나라를 둘러볼 생각이야.’

‘긴 휴가를 떠나신 거네요.’

‘난 비서로 오래 일을 하다가 올 초에 그만뒀어. 일년쯤 쉬고 다시 일을 구하려고.’

‘그러시군요.’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영어 공부를 해서 조금 더 나은 직장을 구하고 싶다고 했다. 캐나다인이지만, 영어보다 불어가 더 능숙하다. 나이가 좀 더 지긋해 보이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올법한 모습을 지닌 그녀의 남편은 불어와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한다. 영어는 못한다며, 이 말들을 그의 아내가 내게 들려준다.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삶의 여러 굴곡을 관통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깊이와 진솔함이 담긴 눈빛을 지닌 사람들이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깊고 푸른 눈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동지애,  타지에서 느끼는 낯선 시선에 대한 공감대. 그래서였는지 와인과 함께 즐거운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부부의 이름은 조지와 줄리엔, 그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나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함께 걸었고, 그리고 몇 주가 지나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내 두 손을 딸처럼 꼭 잡아주었던 분들이다.


Distance: Valcarlos Luzaide에서 론세스바예스 (Roncevalles)까지 17km 
Time for walking: 10:00 am - 5:00 pm  
Stay: 론세스바예스 공용 알베르게 




작가의 이전글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