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면 불안한 당신에게 필요한 것

feat. 퍼펙트 데이즈

by 앙꼬

최근 가수 성시경 씨가 유튜브에서 영화 <라붐>의 OST인 <Reality>를 부르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도 좋았지만, 노래 자체가 가진 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더군요. 복잡하지 않은 리듬 위에 얹힌 아름다운 가사까지, 올드 팝이 가진 고유의 매력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반복해서 듣고 있는데도 신기하게 들을 때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확실히 요즘 노래와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죠.


그 노래를 듣다 보니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옛날과 요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역시 '속도'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결해야 하는 우리에게 속도는 미덕이지만, 가끔은 그 답답했던 시절의 낭만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그 시절엔 스마트폰이 없었으니 친구에게 할 말이 있거나 약속을 잡으려면 집으로 전화를 해야 했습니다. 가족들 눈치에 집 전화를 오래 붙들 수 없을 때는 편지로 마음을 전해야 했지요. 구구절절 써 내려간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상대방의 우편함에 도착하기까지 며칠을 꼬박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편함을 열 때마다 느껴지던 그 설렘은, 오늘날 고지서들이 쌓여있는 우편함을 여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불편함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을 잡고 나갔는데 친구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폰을 보며 시간을 때울 수도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1분 1초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뿐이었죠.


집에서 보내는 여가 시간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OTT 서비스가 없던 시절이라 보고 싶은 방송을 마음대로 볼 수 없었죠. 방송 편성표를 따라가다 재미없는 프로만 나오면, 괜히 집에 있는 책을 펼쳐보거나 카세트테이프를 틀곤 했습니다. 사춘기 시절, 저는 그룹 god의 앨범을 테이프로 사서 닳도록 듣곤 했는데요. 테이프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속지를 보며 가사를 외우던 기억이 선합니다. 이제는 정말 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지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그런 추억의 테이프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도쿄의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그는 매일 아침 출근길 차 안에서 그 테이프들을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영화는 히라야마의 일상을 며칠에 걸쳐 가만히 보여줍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일이 끝나면 대중목욕탕에서 씻고, 동네 술집에서 가벼운 반주를 즐긴 뒤 책을 읽으며 잠드는 삶.


이토록 단순한 루틴은 숏츠와 릴스, OTT 영상으로 일상의 틈을 빽빽하게 채우며 사는 우리와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우리는 쉬는 순간조차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영상을 찾아 헤매다 결국 시간을 허비했다는 자책에 빠지곤 하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마음이 자꾸 공허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자극적인 사건이나 화려한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하지만 <쉘 위 댄스>로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 야쿠쇼 코지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죠.


60~70년대 OST와 함께 흐르는 히라야마의 단조로운 일상을 묵묵히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마음속 불안감이 정돈되는 기분을 느낍니다. 영화가 담아내는 그 단순한 일상이 비단 공공화장실뿐만 아니라, 내 머릿속까지 말끔히 정리해주는 것 같달까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프란체스카 지노 교수는 주변 환경이 혼란스러울수록 자신만의 반복적인 행동 패턴, 즉 '리추얼(Ritual)'이 불안감을 낮추고 심리적 회복탄력성을 높여준다고 밝혔습니다. 히라야마가 몸소 보여준 루틴이 우리에게 깊은 힐링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작업에 몰입하거나 멍하게 보내는 '비효율적인 시간'이 사실은 우리 뇌에 진정한 휴식을 준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몸 안의 장기에 휴식을 주듯, 우리 머리와 몸에도 이 거대한 속도의 시대에서 벗어날 여백이 필요합니다.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막연한 기다림을 즐기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우리 몸이 보내는 간절한 휴식의 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휴식이 필요한 분들께, 그리고 그 시절의 낭만이 그리운 분들께 이번 주말 영화 <퍼펙트 데이즈>로 마음을 디톡스 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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