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이 사치가 된 당신에게

feat. 버스커 버스커 1집

by 앙꼬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매 순간 현실적인 문제들이 제 인생을 꽉 채워갑니다. 당장 이번 달 관리비가 평소보다 많이 나온 것 같아 신경이 쓰이고,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하게 되죠. 아이를 힘들게 재우고 나면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고, 육아로 단절된 경력 때문에 앞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육퇴 후 보는 수많은 콘텐츠 중에서 로맨스 장르야말로 제게는 판타지물이었습니다. 잘생기고 예쁜 주인공들이 썸을 타고 밀당을 하며 울고 웃는 장면에 좀처럼 몰입이 되지 않더군요. '결혼하면 결국 다 똑같이 기저귀 갈고 생활비 걱정하며 살 텐데, 저 설렘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요. 그때는 아이가 너무 어리기도 했고, 달라진 인생에 적응하느라 지쳐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로맨스물은 저와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그냥 제 취향이 아닌 모양입니다.


​이제 날이 제법 많이 풀렸습니다. 제가 사는 부산은 벌써 성격 급한 벚꽃나무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죠. 가지마다 꽃봉오리를 제법 머금고 있는 걸 보니 이제 곧 화사하게 피어날 준비를 마친 듯합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바람과 햇살이 찾아오면, 수많은 연인이 흩날리는 꽃잎 사이에서 그들의 가장 예쁜 모습을 사진으로 찍겠지요. 로맨스물에 무심한 저는 그 풍경을 보며 설레기보다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 덜 붐빌까’를 먼저 고민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저를 여전히 두근거리게 만드는 게 있다면,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앨범 한 장입니다. 바로 《버스커 버스커 1집》입니다.

​"우리 다시 만난 거라/ 그 골목길 어귀에서/ 지난여름 그날처럼/ 나는 또다시 설레이고"
《버스커 버스커 1집》 수록곡 〈골목길 어귀에서〉 중


​약 10년 전 그해 봄,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저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하루를 꽉 채워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중 DVD방 아르바이트는 틈틈이 공부도 할 수 있어 제게는 소중한 일자리였지요. 무엇보다 당시 저와 교대하던 아르바이트생 오빠 덕분에 즐겁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안경을 썼는데, 참 다정했던 사람이었죠.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간혹 그 오빠는 제 마감 시간까지 기다려 함께 퇴근하곤 했습니다. 봄바람이 적당해 기분 좋은 날이면 산책 삼아 저희 집 주변까지 함께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산책이 끝나고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이면 아쉬우면서도 몽글몽글해진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썸'이었겠지요.

​"배드민턴 치자고 꼬셔/ 커피 한 잔 하자고 불러/ 동네 한 번 걷자고 꼬셔"
《버스커 버스커 1집》 수록곡 〈꽃송이가〉 중


특히 오빠와 헤어지고 집 앞 커다란 벚꽃나무 옆을 지나며 《버스커 버스커 1집》 전곡을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장범준의 꾸밈없는 목소리는 그 시절의 설렘을 더 깊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주말도 없이 고단했던 일상이었지만, 그해 봄은 참 따뜻했던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인지 그 오빠의 나이도, 왜 우리가 멀어졌는지도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 하지만 이 앨범은 여전히 설레었던 저의 마음을 잘 간직해 주는 것 같습니다. 노래를 들으면 그때 보았던 벚꽃나무, 공기의 냄새, 기분이 어김없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걸 보면요.


영화는 시각과 청각을 모두 채워주는 종합선물 같지만, 어떨 때는 청각만을 자극하는 음악이 더 생생한 감동을 줍니다.


뇌과학적으로 음악은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해마와 편도체를 동시에 자극하는 강력한 매개체라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특정 순간의 감정이 음악의 선율 위에 새겨져 저장되는 것이죠.


영화는 타인의 서사를 관람하는 것이지만, 음악은 그 선율 위에 우리의 실제 삶이 겹쳐집니다. 내가 직접 채워 넣은 장면들이기에, 그 어떤 고화질 영화보다 생생한 감동을 주는 게 아닐까요?


​이 앨범이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화려한 가창력이나 세련된 음률은 아닐지 몰라도, 이 노래들은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을 가장 잘 대변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히트곡이었다는 걸 넘어서 여전히 명반으로 남아 있는 이유겠지요.

​"내가 미쳤죠 / 내가 또 왜 날 이렇게 / 모든 게 다 한심하게 / 우 살다니 / 뭐가 그렇게 / 내가 또 왜 어린 건지 / 모든 게 다 어려운 건지 / 우 쉽지가 않네요"
《버스커 버스커 1집》 수록곡 〈외로움증폭장치〉 중


진정성 있는 가사와 봄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앨범인 만큼, 많은 분이 저처럼 각자의 추억을 이 노래 속에 간직하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바쁠 테지만, 이어폰을 꽂고 이 앨범을 틀면 잠깐은 그 봄날의 제가 됩니다.


여러분도 이제 곧 흐드러지게 필 벚꽃 아래에서 잠시 고단한 현실은 뒤로하고, 이 앨범으로 다시 한번 추억 속 설렘을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작가의 이전글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잘 실패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