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의젓한 사람들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질문 하나를 불쑥 던졌습니다.
"만약 지구 멸망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떨 것 같아?"
영화 <돈 룩 업>이 떠오르더군요.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거대한 소행성을 발견한 과학자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려 애쓰지만, 세상은 이를 괴담처럼 치부합니다. 결국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지막을 준비하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지구의 멸망이든 혹은 다른 이유에서든,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 것 같나요?
질문을 던진 제 지인은 실제로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삶이 갑자기 끝나버릴까 봐 늘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삶에 대한 지극한 애착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직 가보지 못한 장밋빛 미래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요?
한때 저 역시 인생과 행복에 강박적으로 매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잘 살고 싶었고,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죠. 행복해지는 방법들이 홍수처럼 쏟아졌고, 행복하지 않은 상태는 마치 내가 나약하거나 자기 관리를 못 한 결과처럼 느껴져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지수 기자의 인터뷰집 <<의젓한 사람들>> 속 대가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습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그들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도록 닮아 있더군요.
"인생은 그냥 슬럼프의 연속이에요. 슬럼프를 사는 거죠."
- 작곡가 진은숙 -
우리는 흔히 성공한 이들의 삶은 고민보다 즐거움이 더 많을 거라 짐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합니다. 인생은 본래 힘들고 불안한 것이며,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죠.
가수 양희은 씨는 인생을 자전거에 비유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넘어지는 자전거를 수없이 일으켜 세우며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이죠. 고단한 일상을 묵묵히 버텨내고, 매일의 시간을 성실히 쌓아 올리는 것. 우울과 불안 속에서 이어가는 그 평범한 지속이야말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대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의 불안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남미 사람들은 오랜 식민 지배와 독재라는 험난한 역사를 관통하며 '삶은 고난 그 자체'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통이 기본값이기에 그들은 역설적으로 현재에 집중하고 순간순간을 즐기는 방법을 압니다. 삶의 비극을 겸허히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죠.
그렇다면 <<의젓한 사람들>> 속 주인공들은 이 막막한 불안을 어떻게 다스렸을까요?
그들의 직업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라는 주체를 깊이 이해하고, 나다운 방향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나의 정체성과 자아감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비용과 혜택' 이상의 것입니다. 선택이 고민될 때는 그냥 '나다움'의 규칙을 따르세요."
- 경제학자 러셀 로버츠 -
그리고 망설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비록 시작은 작고 서툴지라도 일단 발을 내디딘 후 조금씩 교정해 나갔습니다.
"너무 하찮아 보여도 일단 뭐라도 하면, 그게 실마리가 되어 풀립니다. 나는 이걸 '뭐라도 해' 원리로 부릅니다."
- 작가 마크 맨슨 -
책장을 덮으며 책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삶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 채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들에게 왜 '의젓하다'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말입니다.
사실 처음 술자리에서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삶이 본래 고단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끝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누군가의 말처럼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삶이라면, 차라리 끝이라는 것이 홀가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젓한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저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대단해 보이는 건 높은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닥쳐오는 역경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가는 그 태도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저에게는 커다란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그동안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들이 있었죠. 순탄치 않은 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거나 삶을 비관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 무력했던 시간들을 도망치지 않고 버텨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바라보니 오히려 저를 이루는 단단한 훈장처럼 느껴집니다.
지금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을 지나고 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나를 집어삼킬 듯한 해일 같아도, 멀리서 보면 그저 출렁이는 파도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요. 바다에 파도가 치는 것이 당연하듯, 삶에 시련이 찾아오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혹시 앞길이 막막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삶이 주는 고통 앞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의젓한 사람들》의 문장 사이에서 다시 일어설 작은 힘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버텨온 사람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