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판단과 결정으로 홈스테이 계약
캘거리를 도착했을 땐 이미 아침 7시가 넘은 뒤였다. 밴쿠버보다 캘거리의 시계가 1시간 빠르다는 걸 이때 알았다. 위탁수하물을 찾아 캘거리 공항 안에서 잘 만한 곳을 찾느라 1층과 2층을 돌아다녔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캘거리 기온은 영하 14도였다. 푸근한 봄의 기온이 맴돌던 밴쿠버보다 10도나 낮은 도시라니. 춥다.
구석 벤치에 드러우눴다. 잠이 올 듯 말 듯 불면증에 빠진 것 같은 불쾌한 기분으로 4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11시가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공항에 있을 수만은 없어서 Kijiji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홈스테이 매물을 검색했다.
미리 알아봐둔 숙소는 있었다. 비록 캘거리 다운타운까지 버스로 1시간 걸리는 먼 곳이지만, 초기 정착금이 모자란 내게 있어 저렴한 숙소 비용은 군침이 싹 도는 조건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집주인과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끈질기게 신분증과 보증금 선납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에 질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이 직접 가서 방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호스트는 '너의 신분증과 보증금을 미리 보내주면 내가 차를 몰고 공항까지 픽업하러 가곘다.' 라고 매달리듯 제안했다.
하루라도 빨리 방을 계약해 편하게 두 발 뻗고 자고 싶었다. 3일 동안 씻지 못한 두피에서 가려움증이 느껴져 온다. 룸렌트 사기꾼 분별, 다운타운과의 거리, 숙소 주변 마트 등 편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했다. 발 한 번 내딛어본 적 없는 외국에서 자리를 잡으려니 신경 쓸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보니 오후 12시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공항을 벗어나야 했다.
일단 ATM에서 캐나다 달러를 인출해야 했다. 힙색에 소지하고 있는 현금은 1,000 CAD가 전부인데, 대다수의 홈스테이가 1달치 숙박비 + 보증금을 요구했다. 보증금은 1달치 숙박비를 100%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주에 따라 다르다. 밴쿠버가 있는 BC주는 월세의 50%를 보증금으로, 캘거리는 월세의 100%를 보증금으로 요구하는 게 일반적이다) 숙소 계약 때문이라도 ATM 기기를 먼저 찾아야 했다.
때마침 통신사 직원에게 요청해 재발급 받은 eSIM을 통해 어디서든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공항에서 다운타운까지 한번에 이동한다는 300번 버스에 오른 뒤, 시내에서 6번 버스로 환승한다. 두 손에 쥐고 있는 총합 33Kg짜리 캐리어 2개를 당장이라도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른다.
캐나다에도 하나은행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간판만 영어로 표기돼 있지, 실내의 홍보 간판은 전부 한국어다. 트래블로그 카드에 미리 750 CAD를 환전해두었는데, 비상금으로 50 CAD만 남겨두고 숙소 계약을 위해 700 CAD만 인출했다. 수수료 0원이라는 게 아주 마음에 든다. 다운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다는 게 살짝 아쉬울 뿐.
점심을 먹으려고 맥도날드에 갔다. 캐나다 워홀을 대비해 8개월 동안 알바했던 한국 맥도날드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필 여기서 캘거리 첫 끼니를 해결할 줄이야. 새로운 환경에 떨어지면 나는 맥도날드부터 찾는다. 왜냐하면 전기 콘센트, WiFi, 화장실 등 모든 것들이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내가 방문한 매장은 테이블 3석뿐인 규모가 작은 매장이라 전기 콘센트를 발견할 수 없었다. 노트북과 휴대폰을 적절히 돌아가며 전자기기의 배터리의 밸런스를 맞춰가며 숙소를 찾아다녔다. 미리 준비해온 20,000mAh짜리 보조배터리가 큰 도움이 되었다.
타들어가는 내 속을 짐작도 못할 집주인들은 메세지를 확인조차 하지 않는다. 창밖은 해가 저물고 있어 회색 구름으로 칙칙해져 간다. 만약 오늘 집 뷰잉을 못하게 된다면 300번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되돌아가 노숙할 생각이다. 그게 더 저렴하기 때문에.
얼마 전 유튜브에서 '룸렌트 사기 당할 뻔한 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촬영자가 직접 집 뷰잉을 하러 갔는데, 간밤에 누가 도망이라도 간 것처럼 실내가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쎄함을 감지했는데 방을 소개해준 중개업자로부터 "저 엄마"라는 표현을 듣고 바로 나왔다고 한다. '엄마'가 아닌 '저 엄마'라니. 엄마가 여러 명이라는 걸까? 소름 돋는다. 유튜버의 촉대로 사기꾼이었으며, 이미 수많은 피해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사기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캘거리 다운타운에 굉장히 마음에 드는 숙소가 믿을 수 없는 가격에 올라와서 호스트에게 다급히 메세지를 보냈다. 그의 답장을 받고 오후 4시 30분에 집 뷰잉을 하러 갈 참이었다. 33Kg에 달하는 캐리어를 들고 다녀야 하므로 최대한 많은 방을 보고 싶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계약할 생각이었다. 메세지를 주고 받던 중 호스트가 왓츠앱으로 소통하자고 하여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그에게서 메세지를 받았다. 그리고 차단했다.
대화의 내용이 이상했다. 호스트가 먼저 오후 4시 30분에 만나자고 제안해놓고, 왓츠앱에서는 몇 시에 올 거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마치 제 3자가 번호를 넘겨받아 대신 일을 처리하는 느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만나 에피소드를 일기에 쓰고 싶었지만, 도저히 육중한 캐리어들을 이끌고, 냉바람 휘휘 불어대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 그들을 차단했다.
다운타운에서 버스로 이동한 곳에 중국인이 호스트로 있는 집을 보러 갔다. 그리고 계약했다. 그는 25년 전에 캐나다로 넘어와서 현재 공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총 2개의 방을 보여줬는데 월 595$짜리 싱크대가 딸린 큰 방, 월 495$짜리 작은 방이었다. 작은 방은 이전 세입자가 나와 같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군대에 가야 해서 급하게 방을 빼게 되었다고.
싱크대가 딸린 방은 이유 모를 곰팡내가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뭔가... 쿰쿰했다. '한국인의 스피릿을 느끼고 싶다'는 핑계로 495$(한화 약 52만 원)짜리 작은 방을 선택했다. 가구에 대해서도 만족스러웠다. 선반, 스탠드, 책상(심지어 2개다) 그리고 침대까지 기본 제공이었다. 지금껏 찾아본 숙소들은 전기세, WiFi 사용량 제한 등 Utility에 대한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이 집은 모든 게 월세에 기본 포함되어 있어 추가금이 발생할 일이 없다고 했다.
내 뒤로 약속을 잡고 찾아온 외국인 여자애가 큰 방에서 집주인과 30분 넘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 방을 빼앗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래서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지 않나. 그녀 덕분에 내가 이 방을 골랐다는 선택을 아주 잘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공용 주방, 공용 화장실, 공용 세탁실 등 홈스테이 특성상 모든 걸 혼자 편하게 쓸 수는 없지만,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도미토리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경험을 가진 내게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실내 난방이 덥지도, 춥지도 않게 알맞게 자동 조정되고 있다는 것. 하나 더! 집주인은 다른 집에 산다.(의외로 이게 엄청나다)
캘거리는 기본 숙소 계약 기간이 6개월이라고 한다. 잡을 어디서 구할지 몰라 2개월로 게약하고 싶다고 했지만, 집주인이 난색을 표했다. 숙소가 다운타운까지 버스로 20분 걸리는 위치라는 걸 확인하고, 캘거리에서 제대로 정착해보자는 생각에 6개월짜리 계약서를 작성했다.
또한 캐나다의 숙소 대부분은 매달 1일에 입주하는 것이 관례인 듯하다. 나는 애매하게 21일에 방문했기 때문에 31일까지 10일치의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에어비앤비로 미리 알아본 10일짜리 임시숙소의 비용이 이 집 1달 월세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방이 비어있어 당장 머무를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집주인을 잘 만난 듯하다. 영어가 서툰 나를 위해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책상 위에 계약서를 올려두고 마주 앉아 양면에 적힌 계약 사항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계약 내용은 상식적인 에티켓을 요구하는 것들이어서 거리낄 게 없었다.
호스트는 입주 선물이라며 이전 세입자가 쓰던 식기구들과 라면 한 봉지를 선물로 주었다. 저녁 시간인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참이라 다행이었다.
"이불이랑 베개 필요해?"
마침 남는 게 있다며 집주인은 산책을 나가는 길에 들러 내 방에 이불과 베개를 놓아주었다. 방금 세탁한 것 같은 향긋한 섬유유연제가 방 안에 퍼져나갔다. 미리 챙겨온 전기장판 위에 제공 받은 베개와 이불을 올려두니 정말 따뜻헀다. 문 앞에 놓여있는 5단짜리 수납장마저 나 혼자 써도 된단다.
라면을 먹으려는데 웰컴 키트에 젓가락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수저나 포크 없이 대형 국자와 뒤집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싱크대 옆에 나뒹굴고 있는 주인 모를 단단한 종이 빨대를 반으로 잘라 젓가락 대신 사용했다. 종이 재질임에도 튼튼해서 놀랐다. 다만 길이가 짧아 면발을 들어올리는데 애를 먹었지만, 고난 끝에 먹은 따뜻한 음식이라 좋았다. 특히 따뜻한 국물로 채워진 배가 뜨뜻해서 포만감이 가득 차올랐다.
캐리어를 열어 방에 짐을 정리했다. 책상과 선반이 넉넉하니 수납 공간이 자유로워 아주 만족스럽다. 방 안에 콘센트가 어느 위치에, 몇 개나 있는지 보려고 책상 뒤를 뒤지다가 한 USB를 발견했다. 64G면 꽤 넉넉한 용량이다. 득템의 기쁨도 잠시, 혹여나 이전 세입자였던 한국인의 흔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내용을 확인하려고 노트북에 꽂았다.
예상대로 이전 세입자의 자료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대학교 과제물과 사진이 가득했다. 집주인 말로는 그가 군대를 갔다고 하던데. 포맷해서 내가 쓸까 싶었지만, 사진만큼 잃어버리면 뼈아픈 추억은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돌려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파일을 뒤지던 중 28초짜리 짧은 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앳된 얼굴의 남자 한 명이 교장 선생님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였다. 그의 낯빛과 목소리가 불안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간 건 캐나다에서의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일까? 남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는 게 아닐까? 그 영상을 끝으로 다른 파일을 열어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과제'라는 키워드가 붙은 hwp 파일을 하나씩 열어나갔다. 이름과 연락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카톡 친구 추천에 이름이 나와서 접선을 시도해본다.
30분 만에 답장이 왔다. 내가 캐나다 캘거리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하니 한번에 집 주소를 떠올렸다. 집주인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단다.(집주인이 세입자들에게 터치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하필 군대에 있어 USB를 받을 방법이 마땅히 없다고 했다. 나는 불가피하게 내용 일부를 확인했음에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굳이...?'라는 반응이다. 딱히 추억이 담긴 USB가 필요없는 듯보인다. 고민해보고 연락하겠단다.
혹여나 이걸 빌미로 내가 어떤 보상을 요구한다고 생각해, 배송비만 부담해주면 된다고 했다. 작가이자 포토그래퍼인 나에게는 이 스토리만으로 충분히 보답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렇다. 나는 이런 예측하지 못한 에피소드를 좋아한다. 그가 마음 편히 택배를 받았으면 좋겠다.
눈을 뜨니 오후 2시 30분이었다. 어라...? 어제 밤 10시에 잤는데. 무려 16시간 30분을 잤다. 살면서 이렇게 자본 적이 있었나? 당황스럽다. 상쾌한 기분이 들지 않아 손해본 느낌이다. 오늘 다운타운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고, 가볍게 장을 봐 올 예정이었기에 서두르기로 한다.
샤워 후 문 밖을 나섰는데 세상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여 있고, 간밤에 내린 눈으로 길거리가 새하얗게 덧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겁나 추웠다. 장바구니 대용으로 20인치 캐리어를 챙겼다. 다행히 집 앞에 5번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이 있었지만, 방금 떠나 20분을 기다려야 했다. 신발에 난 구멍을 타고 찬바람이 훅훅 들어와 발가락이 얼어 붙었다.
캘거리에서는 myfare라는 앱을 통해 대중교통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시내 왕복할 예정이라 4$짜리 Adult Single Ticket 2장을 구매했다. 티켓을 구매한 후 Activate 버튼을 누르면 QR 코드가 활성화되는데, 그 시점으로부터 90분 간 자유롭게 환승할 수 있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The Licensing Company에 방문했다. 밴쿠버에서는 ICBC라는 이름으로 센터를 운영하는데, 캘거리는 다른 이름이라 찾는데 애를 먹었다. Closing time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센터에 도착했다. 오후 4시 30분이었는데 줄이 없어 운 좋게 직원에게 호명되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필요한 준비물을 제출했다.
1. 여권
2. Work permit
3. 한글/영문 운전면허증
4. 숙소 계약서
5. 영문 운전경력증명서
간단한 질의를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안경 착용 여부, 머리카락/눈동자 색상. 이어서 시력 검사를 거쳤는데 이것도 3단계로 이루어졌다. 안경 매장에서 늘상 하는 보이는 숫자 말하기, 12가지 표지판 중에서 가장 커 보이는 것 말하기, 좌우에서 빛나는 LED의 방향 말하기.
10$짜리 헬스 케어에 가입할 것이냐 물어보길래 당분간 운전할 예정이 없으므로 'No'라고 답했다. 직원도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Class 5라는 등급을 받았다.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이 받은 등급이라는 것만 안다. Work permit과 여권에 적힌 내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2028년 4월 18일에 만료되는 운전면허증이 발급될 것이라고 했다. Work permit 만료일을 기준으로 내 생일을 참고해 3개월의 추가 기간을 부여해주었다. 내가 그때도 캐나다에 있을까?
계약서에 서명하고 어제 밴쿠버에서 만든 TD Bank의 Debit Card로 45$을 결제했다. 영업일 10일 이내에 우편으로 받을 수 있다는 직원의 안내를 듣고, 빨리 신청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백수일 때 해놔야 미래가 편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운전면허증과 영문 운전경력증명서는 센터에서 보관한다며 가져가버렸다.
의자에 앉아 얼굴 사진을 촬영한 뒤, 임시면허증을 발급 받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시계를 보니 4시 55분이다. 약 2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센터 문을 나서니 직원이 칼 같이 문을 잠가버린다. 내가 마지막 민원인이었나 보다.
신분증으로 항상 여권을 들고 다녀야 하는데, 분실하면 매우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운전면허증을 빠르게 발급받은 것이다. 캐나다에서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시련을 좋아한다고 오해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일은 사양이다.
다운타운에 나온 겸 생필품을 사러 캐나다판 다이소로 불리는 달러라마에 갔다. 젓가락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당황케 한다. 가격 또한 다이소처럼 1,000원 단위로 구분돼 있는 게 아니라 5$ 아래에서 소수점 0.25, 0.5, 0.75 등 가격이 오락가락했다. 물품 종류도 한국보다 적어 딱히 사고 싶은 물건이 없었다.
캐나다인들은 폼클렌징을 아예 안 쓰나? 어째서 바디워시+샴푸+컨디셔너 3 in 1이라는 신박한 제품이 매대에 진열돼 있는지 모르겠다. 아쉬운 대로 세안용 오이 비누 2팩이 묶인 1세트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소형 쓰레기통, 냄비 받침대를 살까 하다가 수입이 없는 현 상태에서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방에 있는 비닐봉투와 영어 문제집을 활용하기로 한다. 벌써 5$ 벌었다!
캐나다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위한 배려가 깔린 문화가 퍼져 있는 듯하다. 결빙으로 미끄러울 길을 조심하라는 주의사항 표지판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도시임에도 우리나라처럼 시끄럽게 스피커로 방송을 울려대거나, 지저분한 불법 현수막을 걸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고요함이 내게 엄청난 여유를 안겨다 준다. 벌써 캐나다가 좋다.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영하의 온도를 견디지 못한 탓인지 휴대폰이 죽어버렸다. 종종 추운 날이면 휴대폰 화면이 안 켜지는 날이 있었지만, 이번엔 아예 전원이 나가버렸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 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는 있었다.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기억 나는 건 집 근처에 SAIT라는 대학교가 있다는 것 정도. 일단 버스에 올라 눈에 불을 켜고 창문 밖을 주시했다. 익숙한 도로가 나와 하차 벨을 누르고 내렸는데, 다행히 집 근처가 맞았다. 어휴... 휴대폰을 하나 장만해야겠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떴다. 블라인드를 걷어보니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칙칙했던 내 방을 비춰주었다. 방 계약한 지 2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주 만족스럽다. 이제 잡만 잘 구하면 되겠다. 어떤 일을 할지보다 어디서 일을 할지가 정말 중요해졌다. 이 방에서 6개월을 살아야 하니 말이다.
숙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조용하다. 1층은 나를 포함해 총 3명이 사용하는데 2층 거주자를 포함해 모두 쥐 죽은 듯 조용히 산다. 덕분에 해보고 싶었던 영어, 전기전자, 프로그래밍 공부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로서는 최고의 환경이다.
어제 저녁 거실에서 새로 사귄 Ankit라는 인도인 친구가 추천해준 쇼핑몰에서 장을 봤다. 숙소에서 도보 15분 거리라 그리 멀지도 않다. 달러라마, 휴대폰 매장, 의류 매장 등 없는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규모가 큰 Safeway라는 식료품점에 들렀다. 이번에도 20인치 캐리어를 끌고 갔다. 기내식으로 먹었던 김치, 유통기한이 임박해 50% 할인하는 4L짜리 우유, 한국 라면 등. 어지간한 물품들은 다 있었다.
다만 내가 요리를 해본 경험이 적어 김치볶음밥, 소세지야채볶음밖에 할 줄 모른다. 어차피 물가가 비싼 캐나다에서 살아남으려면 요리는 필수이기 때문에 이참에 하나씩 알아가보려 한다. 쌀을 포함해 시리얼, 식빵, 딸기쩀 등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Do you have a SIN Card?"
SIN Card는 고용주에게만 보여줘야 하는 중요한 정보인데, 어째서 카운터 직원이 모든 손님에게 이 질문을 하는건지 의아했다.
"SIN Card가 뭔가요?"
직원이 카드를 뭔가를 하나 가져오더니 이참에 만들라고 한다. Safeway 매장의 멤버십 카드였던 것이다. 카드 앞면에 'Scen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직원에게 영수증을 받아들었는데 벌써 100 point가 쌓였다고. 1,000 포인트를 10$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설명까지 들었다.
"You are Safeway family now!"
무심한 듯 친절한 아주머니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전국 Safeway 매장에서 적립 및 사용할 수 있단다.
출국 하루 전 날 당근에서 급하게 구매한 20인치 캐리어를 이렇게 유용하게 쓸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역시 짐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고, 돈은 아끼는 게 좋다. 신발에 들어오는 냉기를 막으려고 살구색 스포츠 테이프를 감쌌다. 여전히 발가락이 시리다.
집에 돌아와서 라면이 아닌 토스트와 시리얼로 한 끼를 해결한다. 상당히 만족스럽다. 특히 시나몬 시리얼은 달콤한 시나몬 맛이 제대로 느껴져서 좋았다. 어제 무리한 탓인지 감기에 걸려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많이 난다. 떨어지는 컨디션을 달래려고 산 핫초코를 한 모금씩 마신다.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시차 적응에 실패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지 이틀이 지나고 있다. 제대로 잠을 자야 무리없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텐데. 루틴을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기는 내게 질 좋은 수면은 중대사항이다. 내일부터는 레쥬메(이력서)를 써서 구직 활동에 나서야겠다. 고정 수입만 확보하면 초기 정착은 마무리된다. 하루 빨리 그 너머에 있을 재밌는 일들을 해나가고 싶다. 그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