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노자의 삶(1) - 레쥬메 작성

싱싱한 일꾼 좀 받아봐라 이것들아

by 안승환

2026.01.25(월) / Calgary

Screenshot 2026-01-30 at 8.04.22 PM.png 이력서 외 '재개하다'는 뜻도 가진 레쥬메

이력서라는 뜻을 가진 레쥬메가 처음엔 프랑스어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캐나다는 영어와 불어를 혼용해서 쓰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Alberta주에 속하는 캘거리는 영어를 주로 쓰는 곳이라 불어의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는다.

발품을 팔아가며 직접 매장에 들어가 직원에게 레쥬메를 전달하는 것을 '레쥬메 드랍'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구직 방식과 사뭇 달라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디지털이 잘 돼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선호한다는 현지인들의 성향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왜 굳이...

잡을 구하는 것으로 워홀 초기 정착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나처럼 캐나다에 특별한 인맥이 없는 평범한 외노자들은 '현지 인맥 찬스' 같은 사기적인 찬스를 바랄 수가 없는 실정이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어쩌겠나.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 앞서 모진 역경을 헤쳐나간 선배들의 경험담을 통해 과감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축복이다. 홀로 당당히 한국을 벗어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준다.


Screenshot 2026-01-30 at 8.12.43 PM.png 집을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1,2,3번으로 우선 순위를 잡았고, Far는 도보 50분 or 버스 1회 환승 필수인 끔찍한 거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쥬메 드랍 4일차가 끝나가도록 여전히 구직 중이다. 어느 누구도 연락을 주지 않는다. 아니, 사실 1곳에서 Full-time 주방 포지션을 제안한 곳이 있었다. 사장님이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일식집이었다. 홀 포지션으로 지원한 곳이었는데, 주방에서 근무해볼 생각 없냐고 문자로 제안해주신 거였다.


IMG_5066.jpg 레쥬메 드랍 2시간 만에 일식집에서 다른 포지션 제안을 받았다

뻔뻔했던 나의 말투에 매력을 느끼셨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줘도, 유창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완충되었던 자신감이 깎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기는 죽지 않는다. 나도 그게 신기하다. 30대를 넘어서 그런가. 타인의 시선에선 그게 자신감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충 2시간 전에 레쥬메 드랍한 일식집에서 다른 포지션을 제안한 이유가 납득되는 것 같다. 짧게 주고 받은 대화를 통해 그들이 내게 Full-time을 주고 싶다는 걸 알게 됐다.




구직 활동에는 다양한 루트가 있다.

1. 온라인 지원
ㄴ indeed, kijiji, craigslist, Job bank, CN Dream, 워홀 관련 카페 등
2. 레쥬메 드랍
ㄴ 매장에 직접 방문하여 레쥬메 제출
3. 지인 추천


1. 온라인 지원

한국에서도 알바천국, 알바몬, 당근마켓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이력서를 제출할 수 있기에 그리 어려운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이용하지 않으면 마땅한 기회를 잡기 어렵다. 그런데 캐나다 현지 분위기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으로 직접 방문해서 얼굴 도장 찍는 지원자를 더욱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레쥬메에 이름, 주소, 이메일, 경력사항 등을 기재하는데 지원자의 얼굴이나 개인 신상 같은 것을 넣으면 안된다고 한다.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어길 경우 채용 담당자는 '이 사람은 레쥬메의 기본도 모르는구만'이라며 건너뛰어버린다고 한다. 다문화가 어우러져 사는 캐나다라서 지원자의 프로필 사진이 주는 선입견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라고 들은 것 같다.

온라인은 지원 방법이 워낙 간단하기 때문에, 공고 하나에 최소 50명 이상의 지원자가 금방 몰린단다. 그래서인지 채용 담당자들은 공고만 올려두고 확인을 잘 안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수많은 레쥬메 사이에서 내가 담당자들 눈에 띄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캐나다 현지 경력이 매우 강력하다. 한국에서 얻은 여러 개의 경력보다 캐나다에서 쌓은 1개의 경력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경험담이 많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고용주라면 영어를 잘 하는지도 모르는 혹은 입증되지 않은 외국인보다 우리나라에서 일해본 경력이 있는 근로자를 선호할 것 같다.

그러므로 나 같이 이제 막 캐나다에 입국한 무경력자들은(캐나다 현지에서) 경쟁력이 있는지 고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낙담하기엔 이르다. 사람 앞일은 모른다. 일단 던져놓으면 어떻게든 연락이 오지 않을까. 온라인으로 지원한 레스토랑에서 2달 후에 면접 제의가 왔다는 유튜브 영상도 봤다. 나는 직접 부딪혀보고 싶어서 나중에 온라인으로 지원해보려 한다.


2. 레쥬메 드랍

아날로그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프린터로 출력한 레쥬메를 들고 직접 매장에 찾아가 채용 담당자에게 제출하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영어도 못하는 외노자가 현지인들이 바글바글한 굴에 쳐들어가서 '너네 매장에서 일하고 싶어'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겠는가? 그럴 수준이었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겠지.

워홀 경력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채용 담당자들은 지원자를 직접 보고 뽑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워홀 경험자가 없어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각종 구직 후기의 내용을 조합해보면 놀랍도록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프라인으로 레쥬메 제출하는 방식이 모순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선입견을 예방을 위해 프로필 사진을 첨부하지 말라면서, 직접 얼굴을 비춘 지원자를 선호한다고? 물론 임금을 지불하는 채용 담당자의 고유 권한이겠지만... 머리가 아파온다.

직접 레쥬메를 전달한다고 100% 채용되는 건 아니다. 각 지역의 매장 상황 또는 시즌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인터뷰하러 오라고 연락이라도 오면 다행이다.


3. 지인 추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알게 된 방법이다. 단골 손님으로부터 "우리 매장에서 일해보지 않을래?" or "내가 아는 매니저가 사람 구하는 중인데 소개해줄까?"라는 제안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나에게는 아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도 있구나'하고 참고만 한다. 캐나다 캘거리에는 내가 아는 지인이 없다. 한국 반대편에 있는 이국땅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이토록 외롭고도 처절한 것이다. 흑흑. 어쩔 수 있나. 맨 땅에 헤딩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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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건축 디자인 및 탁월한 기능성을 인정 받은 Calgary Central Public Library

레쥬메를 드랍하려면 당연히 인쇄물이 필요하다. 캘거리는(또는 캐나다 전체가) 한국 같은 무인프린터 카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집에 프린터를 들이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럽다. 이때 나 같은 외노자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주는 곳이 바로 공공 도서관이다.

캘거리 다운타운 동쪽에 홀로 자리한 Calgary Central Library에서 도서관 회원 카드를 만들러 갔다. 여권, 숙소 계약서 등이 필요하다는 글을 참고해 모든 서류를 챙겨갔지만, 직원이 내미는 양식에 이름, 주소, 연락처, 이메일을 적는 것으로 절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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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수대, 체스판, PC 등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심지어 화장실도!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알던 도서관은 책 + 공부가 전부였기 때문인데, 여기는 약간의 소음이 허용되는 놀이터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가족 단위로 놀러온 방문객들이 많았는데, 피부색이 모두 다름에도 어느 누구 하나 그 차이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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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회원 카드를 발급 받으면 WiFi, 미팅룸 예약, 프린터 등 무료 이용 가능(프린터 Credit 5$ 제공, 매달 1일 자동 충전)

시내에 있는 공공 도서관의 위엄일까? 총 4층까지 있는데 수평으로 넓게 퍼져 광활한 실내 공간을 자랑한다. 도서관이라 책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인데, 아이들 전용 미니 도서관을 보고 놀랐다. 나는 프린터 위치 파악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엘레베이터를 타지 않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4층에 흑백과 컬러 프린터가 따로 구비돼 있었다. 당연히 인쇄 비용도 다르겠지? 아쉽게도 레쥬메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 프린터를 이용할 수 없었다.

다운타운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닌 탓에 온몸에 피로가 몰려온다. 지친 몸을 달래려 햇살이 비치는 창가 테이블에 눕듯이 앉는다. 맞은 편에서 고개 숙여 졸고 있는 노숙자를 직원이 와서 가볍게 터치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직원이 떠나자 노숙자는 졸음에 빠진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캘거리의 풍경은 지극히 평범했다. 나도 저 일상에 녹아들고 싶다는 태평한 고민에 빠진다. 누가 일자리를 떠먹여주지 않으려나. 한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레쥬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솔직히, 너무 귀찮다.

레쥬메를 한국에서 미리 만들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 그건 좀 어렵다. 캐나다 현지 휴대폰 번호를 기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진행한 공동구매로 통신사를 미리 결정할 수 있었지만, 캐나다에 입국하기 전까지 현지 번호를 사용하기 어렵다.(로밍 비용 등)

또한 처음 만들어보는 레쥬메가 완벽할 수는 없다는 걸 살아온 경험에 빗대어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발로 뛰며 레쥬메를 드랍하면서 상대방의 반응을 하나씩 체크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조금씩 수정하며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게 지름길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나는 이렇게 하기로 한 것뿐이다.




IMG_4999.JPG Server, Cook 포지션에 맞게 2종류의 레쥬메를 준비했다

현대 사회는 디지털 시대다. 어린 아이도 쓰는 AI의 힘을 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샘플을 참고해 모든 내용을 직접 작성할 예정이었으나, 선배들이 남겨놓은 '취뽀하는 레쥬메 만들기!' 영상을 보고 적극적으로 GPT를 사용하게 됐다.(영어가 서툰 외노자에겐 GPT 같은 AI 툴은 빛이면서 소금이다)

레쥬메 양식은 다양하다. 내가 만든 것처럼 단순한 것부터 휘황찬란한 것까지. 물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지만, 기본적인 양식만 따라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채용 담당자의 관점에서 레쥬메를 받는 상상을 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다양한 나라의 워홀러들이 내미는 레쥬메의 디자인이 과연 휘황찬란할까? 단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 템플릿을 구하려면 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1$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가난한 워홀러의 심정을 그들이 알아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디자인이 화려하면 눈에 익지 않은 포맷이라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서 거품을 뺀 텍스트 중심의 기본적인 레쥬메를 채택했다. 물론 이걸로 잡을 구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레쥬메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Summary(강점 어필), Experiences(경력), Education(학력), Additional Activity(추가사항). 물론 지원자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병역 사항을 좋게 본다는 게 떠올라서 육군 만기 전역도 썼다. 그렇게 Server와 Cook 포지션의 레쥬메가 각각 완성됐다.

Server는 고깃집에서 홀서빙하던 대학생 때 경험을 끌어왔다. 거기에 25년도에 3개월짜리 홀서빙 경력을 넣었다. 그래봐야 2개밖에 되지 않는다.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살짝 조바심이 난다. Server는 손님을 직접 응대해야 한다는 조금은 두려운 언어의 장벽이 있는 포지션이지만, 같은 시간 대비 '팁'이라는 어마어마한 부수입을 통해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래서 영어의 장벽이 두려워 주방으로 일을 시작한 워홀러들도 악착 같이 Server로 전향한다고 한다. 나 역시 두려움은 있지만 혹시 하는 마음으로 Server 레쥬메를 다듬어 본다.

Cook은 주방에서 일하는 포지션이다. 시급에 따라 일하는 만큼 돈을 번단다. 8개월짜리 맥도날드, 4개월짜리 피자 레스토랑 경험으로 채워넣었다. 동종 업계인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적어도 나는 지금껏 일하면서 '일 못하네'라는 말은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건 내 자랑이다.


'레쥬메 작성'을 검색해보면 경력 작성에 대한 수많은 의견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경력 뻥튀기'에 꿀팁이 눈에 띄었다. 예를 들면 나는 뼈구이 매장에서 홀서빙을 3개월 했는데, 이걸 6개월로 채우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따르는 게 맞다고 본다. 지원자가 많은 업주들 입장에서는 캐나다 현지 경력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관련성 있는 업무를 오래 해본 사람을 선호하지 않을까. 그래서 뼈구이 홀서빙 실경력은 3개월이었지만 4개월이라고 늘려 적었다. 양심에 찔리는가? 그렇다면 기회가 왔을 때 그에 맞는 노력으로 커버하면 된다. 그뿐이다.

다만, 선배들은 입을 모아 '없는 경력을 지어내지 말라'고 강하게 조언했다. 어차피 면접 볼 때 다 드러난단다. 국제적 망신이다.


밴쿠버에 사는 현경씨에게 레쥬메를 보여주며 의견을 구했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치트키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꼼꼼히 내 레쥬메를 봐주었고, '이 정도면 충분해요.'라는 심플한 피드백을 주었다.

그러면서 추가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사실 레쥬메보다 인터뷰 질문을 잘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영어를 얼마나 잘 구사하는지', '비자 유효기간은 얼마인지', '우리 매장에서 얼마나 일할 생각인지?'. '출퇴근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등. 산 넘어 산이네. 에휴... 레쥬메 드랍을 마무리하면 가볍게라도 인터뷰 예상 질문을 공부해봐야겠다.


IMG_4942.JPG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멜라토닌을 매일 한 알씩 먹기 시작지만, 여전히 잠을 못 자서 힘들다

감기 + 시차 적응 실패 + 귀차니즘에 찌들어 하루씩 밀리던 나의 레쥬메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제 레쥬메 드랍을 해볼까.




Full-time을 제안했던 일식집의 인터뷰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는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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