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졌을 때 비로소 또렷해진 감사와 존중
결정을 내리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눈앞의 일과 감정, 책임과 판단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가 먼저였고,
그래서 나는 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방향을 정하고 나니,
조금씩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법인장’이라는 역할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시선이
조금 느슨해졌다.
업무를 맡긴 사람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쌓아온 동료로서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의 책임을 감당하고 있던 모습들,
말없이 버티며 하루를 넘기던 순간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장면들이
이제는 감사로 다가왔다.
조직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선택과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 안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성과가 있었던 날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더 많은 대화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한 발 더 내디뎌야 했다.
나 역시 그 시간 속에 있었고,
그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기로 마음먹은 뒤에야
그 모든 과정이
얼마나 많은 신뢰 위에 쌓여 있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역할을 내려놓는다는 건
모든 것을 뒤로 남긴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배운 것들이
더 또렷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판단을 내릴 때 무엇을 먼저 봐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 선택이 필요한 순간은 언제인지
책임이란 결국 어디까지 감당하는 것인지
그 모든 감각은
이 자리를 떠난다고 해서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이 조직에서의 시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늘 옳은 판단을 하게 해주지는 않았지만,
판단의 무게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 시간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가까이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각자의 역할이 얼마나 무거운지,
각자의 판단이 얼마나 많은 고려 위에 놓여 있는지.
한 발 물러서서 보니,
그 모든 선택들이
결국은 조직을 지키기 위한 고민의 결과였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됐다.
떠나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나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다.
비판보다 감사가 먼저 떠올랐고,
서운함보다 존중이 남았다.
그건 체념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결과였다.
어떤 자리는 떠난 뒤에야
비로소 의미가 분명해진다.
나는 이 시간을
후회가 아니라 배움으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그 배움은,
앞으로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