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이 결정한다

‘책 편식가의 제멋대로 독서일지’

by 은미

7번 국도에 간 적이 있다. 같은 길을 수차례 왕복했지만 기억은 제각각이다. 봄꽃이 핀 길을 차로 달릴 때. 비 오는 거리에 서 있을 때. 눈 쌓인 길을 애인과 걸을 때. 길은 늘 거기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달랐다. 혼자였고, 우리였으며, 웃었고, 울었다. 때문에 나는 7번 국도가 어떤 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 길 위의 내가 어땠는지는 이야기할 수 있다.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객관적 평이 아닌 주관적 감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건 박애주의와 거리가 먼 자유로운 편애를 즐기는 책 편식가의 제멋대로 독서일지다.


나는 최근 독서 성장 에세이 『소중한 경험』을 펴낸 김형경을 10여 년 전 소설가로 처음 만났다. 고등학교 2학년 지루한 어느 수업시간,『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완독 했다. 프로이트도 정신분석이란 말도 낯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낯선 건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온 감정의 영역을 이성의 언어로 풀어내는 표현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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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잘 표출되지 않았고 분노 대신 신체적 통증이 더 자주 찾아왔다. 버릇처럼 통증을 참고 있으면 이내 온몸에서 맥이 빠지면서 탈진하는 느낌이 왔다. 그것이 내가 오래도록 슬픔이나 분노를 처리하는 방식이었음을 이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中


이전까지 나는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반쪽짜리 독서를 하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에 마음이 먼저 반응하면 머리는 남의 나라 일인 양 ‘그런가 보다’ 했다. 반대로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는 둘이 하나가 됐다. 감정이입의 농도가 진해졌고, 주인공을 이해하는 정도가 깊어졌다. 독서의 매력은 ‘마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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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말랑말랑한 감정의 실체를 분명하고 선명한 언어로 잘 풀어내는 작가. 내가 받은 김형경의 첫인상이었다. 1983년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1985년 소설가가 되었으며, 1993년 1억 고료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나는 첫 만남을 기억하며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봤다. 『세월』『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담배 피우는 여자』『사람 풍경』『좋은 이별』등 접하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작가에 대한 인상도 한층 풍성해졌다.


어쩌면 한 작가의 많은 작품 중 처음으로 만나는 작품이 이후의 만남을 결정하는 게 아닐까. 좋았던 첫인상에 기대 다음이 기다려지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나빴던 첫인상으로 다음이 사라지는 작가가 있다. 첫인상을 배반해 매력적인 작가가 있고, 첫인상을 배신해 멀어지는 작가도 있다. 첫인상이 얼마나 많은 오해를 담고 있는지 경고하는 메시지는 많지만 어쩌랴 처음이 없으면 다음도 없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