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로 들어가는 길목의 역사
산조대교(三条大橋)와 시조대교(四条大橋)는 오늘날 교토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 중 하나다. 다리 서쪽에는 교토 최대 번화가인 가와라마치와 폰토초 거리가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전통 거리 기온으로 이어진다. 두 다리는 양쪽 지역을 오가는 현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연중 붐빈다.
산조대교와 시조대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장소지만, 외형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산조대교의 난간 기둥 위에는 빛바랜 청동 장식물이 하나씩 얹혀 있다. 기보시(擬宝珠)라 불리는 장식이다. 원래 불교 사찰의 난간이나 다리 교각 위에 설치되던 것으로,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다리를 보호한다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은 장식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산조대교가 한때 이 도시로 들어오는 ‘공식적인 문’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산조대교는 지리적으로 가모강을 건너 동쪽에서 교토 시내로 진입하는 중요한 길목에 놓여 있다. 에도 시대, 에도(현재의 도쿄)에서 출발한 여행객들은 교토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만 넘으면 천황이 거주하던 교토 고쇼까지는 걸어서 30분 남짓이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산조대교를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돌로 교각을 세우고, 난간에는 청동 기보시를 올려 다리를 화려하게 꾸몄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의 도로망을 정비하며 에도와 교토를 잇는 도카이도(東海道)의 종착지를 산조대교로 정했다. 도카이도는 에도의 니혼바시에서 시작해 약 500킬로미터를 달려 이곳에서 끝난다. 물리적으로는 주요 간선도로의 종착점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막부의 권력과 천황의 권위를 잇는 행로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이 때문에 산조대교 주변에는 여관과 찻집이 모여들었다. 에도 시대의 인기 소설 『도카이도추 히자쿠리게』에서 주인공 ‘야지’와 ‘키타’가 긴 여정 끝에 교토에 도착해 감격을 나누는 장소도 바로 이 다리다. 오늘날 다리 서쪽에 두 사람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다.
기보시는 아무 다리에나 설치할 수 있는 장식이 아니었다. 에도 시대에는 다리에 기보시를 올리는 일은 엄격한 격식의 문제였다. 막부나 조정이 직접 관리하는 다리에만 허용된 장식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가 관리하는 중요 시설이라는 표시였다.
시조대교에는 산조대교와 같은 기보시가 없다. 이 다리는 야사카 신사로 향하는 참배객과 가모강 변의 유흥가를 찾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다. 주변 신사와 민간의 헌금으로 유지된 다리였기에, 국가의 격식을 상징하는 기보시를 올릴 수 없었다. 유동 인구가 많고 화려한 기온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정치적 위상에서는 산조대교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고조대교에는 기보시가 있다. 국가가 관리하던 다리였다는 뜻이다. 이 다리 역시 히데요시가 교토로 들어오는 주요 길목으로 정비한 곳이다. 오사카를 거점으로 삼았던 히데요시는 상업의 중심지에서 교토로 들어오는 통로를 중시했다. 당시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요도강을 거슬러 올라온 사람과 물자는 교토 남쪽의 항구 도시 후시미에 닿았다. 그곳에서 육로로 이동해 도심에 들어올 때 가장 먼저 건너는 다리가 고조대교였다.
산조대교가 에도와 연결된 동쪽의 정치적 관문이었다면, 고조대교는 오사카와 이어진 남쪽의 상업 관문이었다.
에도 시대에 교토의 출입문 역할을 한 것이 산조대교였다면, 더 거슬러 올라간 헤이안 시대에는 라조몬(羅城門)이 있었다.
라조몬은 794년 헤이안쿄가 조성될 때 도시 남쪽 중앙에 세워진 정문이었다. 가로 약 33미터, 높이 약 21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붉은 기둥과 푸른 기와로 장식된 문은 외교 사절과 여행객을 압도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도시의 중심축인 주작대로(朱雀大路)가 펼쳐지고, 길 끝에는 천황의 거처인 대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도시 서쪽 지역이 습지화되며 쇠퇴하고, 교토의 중심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자 라조몬은 방치되기 시작했다. 980년, 폭풍우로 무너진 뒤 끝내 재건되지 못했다. 폐허가 된 국가의 정문은 도둑들의 소굴이 되었다. 기근과 전염병이 돌 때면 시신이 방치되는 장소로 변했다.
사람들은 이 문을 더 이상 도시의 출입구로 보지 않았다. 라조몬은 인간의 세계와 요괴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로 인식되었다. 문 안쪽은 천황이 다스리는 법과 질서의 공간이었고, 문 밖은 귀신과 요괴가 출몰하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라조몬 위층에 세상을 수호하는 비사문천 상을 모신 것도, 이곳을 통해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라조몬은 터만 남아 있다. 교토역 인근의 작은 공원에 세워진 비석 하나가, 이곳이 한때 교토의 정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교토를 찾는 여행객을 맞이하는 관문은 교토역이다. 철근과 유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로, 교토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건물이다.
교토역은 1877년 메이지 정부 주도로 세워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철도를 근대화의 핵심 수단으로 삼았고, 도쿄와 오사카를 잇는 간선 노선 위에 교토역이 놓였다.
교토역이 현재 위치에 자리잡게 된 데는 여러 조건이 작용했다. 당시 기술로는 경사진 지형에 철로를 놓기 어려웠다. 평탄한 땅과 넓은 부지가 필요했다. 산조나 시조 일대는 이미 인구가 밀집한 시가지였다. 반면 교토 분지 남쪽, 특히 시치조 남측은 비교적 미개발지였다. 도심의 가옥과 사찰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역은 외곽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세워진 교토역은 세 차례의 큰 변화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역은 교토의 남북 주축 도로인 가라스마 도리의 남쪽 끝에 놓여 있다.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교토 고쇼에 이른다. 헤이안 시대, 라조몬을 지나 주작대로를 따라 궁궐로 향하던 동선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교토역은 헤이안 시대 남쪽 관문이었던 라조몬의 역할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는 듯하다.
교토의 관문은 시대마다 모습을 바꾸어 왔다. 천여 년 전에는 요괴와 인간의 세계를 나누던 거대한 라조몬이 있었고, 사백여 년 전에는 도카이도의 끝에서 여행자를 맞이하던 산조대교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거대한 유리와 철의 계곡 같은 교토역을 통해 이 도시로 들어온다.
교토역을 나서는 우리는, 오랜 여정 끝에 산조대교에 도착한 옛 여행자의 설렘과, 라조몬을 올려다보던 헤이안 사람의 경외심을 함께 떠올린다. 교토의 관문은 그렇게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이 도시를 찾는 이들을 맞이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