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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Jul 07. 2020

114. 내가 노트북을 새로 산 이유

최근, 태블릿과 노트북 기능을 모두 지닌 전자기기 하나를 선물 받았다. 선물해준 사람은 우리 집에 살고 있는 뚜띠 아저씨. 사준 건 고마운데 저러면 매달 월급을 덜 보내주겠단 얘기겠지. ^^ 일하는 마누라 무거운 거 들고 다니지 말라는 배려에 너무너무 감동스럽긴 하다. 이렇게 깜짝 선물을 받기도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유로 노트북을 구매한 일이 있어 한 번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교무실 체계가 아닌 선생님마다 지정 강의실이 있는 학원에서 일할 때였는데 선생은 50명이 넘지만 공용 컴퓨터는 2개뿐인 학원이었다. 50명 넘는 인원이 프린트를 하려니 성질 급한 나는 일 처리에 불편함이 느꼈고 개인 노트북을 가져와 수업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내 개인 강의실에 무선랜을 잡아 프린트나 복사를 하니 다른 선생들하고 괜히 마음에도 없는 사담을 나눌 필요도 없어서 참 편했던 것 같다.


근데,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당시 특목 대비반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남학생 하나가 너무 까불거려서 언젠가 한 번 저 놈 혼내야겠다고 기회를 보던 참이었다. 수업 시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내 책상 주변을 알짱거리던 이 녀석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내가 마시고 있던 커피를 들었다 놨다 장난을 치며 한 모금만 먹겠다고 까불거리더니! 노트북 키보드에 커피를 확 쏟아버린 것이다.


그 당시, 키보드 덮개를 해둔 상황도 아니었기에 커피가 안 쪽 까지 스며들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이 까불이 녀석은 강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녀석을 잡아올 생각보다는 노트북에 쏟아진 커피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그날, 그 녀석은 끝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고 치고 겁이 났나 보다 생각은 했지만 뭐 다음 수업에는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 수업에도 오지 않아 그 녀석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제 그만 다니고 싶다네요.


학원을 그만두겠단다. ㅎ


나는 지난주에 그 녀석이 내 노트북에 커피를 쏟았다는 얘기와 당분이 함유된 음료라 수리조차 할 수 없다는 얘기를 전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래서 수리비 드려야 하냐는 얘기를 건네는 이 엄마. 사과를 먼저 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들이나 엄마나 참 똑같아 보였다. 수리비를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사과도 없이 도망친 것에 대해 내가 느낀 감정을 전달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수리가 불가능한데 무슨 수리비를 얘기하시냐고 했다. 그러자 그럼 새 것으로 사주길 바라냐고 묻는 이 아주머님. Oh my gosh.


나는 새 것을 바라지도 수리비를 받고 싶지 않으나 학원으로 찾아와 정식으로 사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가 노트북 근처에 커피를 둔 것도, 노트북 키보드 커버를 안 한 것도 문제였으니 내가 새로 구매하겠다고 돈 걱정은 마시라고.


어쨌든 미안하게 됐어요.


어쨌던? ㅎ이 엄마 말본새가 아주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아이의 사과를 기다리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사과를 했냐고?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페이스북으로 도착한 메시지 하나.

낯익은 이름, 커피 쏟은 그 도망 남이네. ㅎ


선생님, 저 ㅇㅇㅇ이에요.
ㅎㅂ학원에서 저 과학 가르쳐주셨는데 기억나세요?
그때 사과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제가 철이 없었어요.
저 대학생 되고 철들어보니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꼭 뵙고 싶어요.


아주 오래 걸린 사과였다. 난 답장을 보냈다.


덕분에 노트북 좋은 거로 바꿨었지. 나중에 얼굴 한 번 보자. 그땐 엉덩짝 한 대 때려줄 거야. ^^


나름 해피엔딩이어서 다행이었던 내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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