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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Nov 06. 2020

1. 똥배의 배신, 너 혹이었어?

당신 배, 요새 좀 나온 것 같아.


맞다. 요새 배가 나왔다.

평생 모태 마름으로 살았던 내가 어느 날부터 45kg가 넘기 시작했다. 뭔 어이없는 자랑질인가 싶겠지만, 고1 때는 38kg이었고 35세 때도 43kg였던 나다. 먹어도 먹어도 찌지 않는 홀쭉이였는데. 그런 내가 요새 체중도 늘고 똥배까지 볼록 나오길래 아, 나도 어쩔 수 없는 아줌마라 나잇살이 찌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생리통이 심해 한 달 중 컨디션 좋은 날이 절반뿐이어도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려려니 폐경 전에 내 자궁이 발악을 하려니 무덤덤하게 넘겼다. 그런데 사달이 날 줄이야...


누워서 내 배를 조심조심 만져보고 거울로 자세히 관찰하니 똥배의 모양이 좌우대칭이 아니었다. 왼쪽으로 치우친 모양. 혹시 내 늙은 자궁에 혹이 생겼나 싶었다. 뭐 내 나이 또래 여자들 자궁에 혹 한 두 개씩은 가지고 있는 거야 비일비재하니 이 똥배도 별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큰 혹이면 떼 버리면 되는 거고 수술 후 적당히 일정 조정해서 쉬고 복귀하면 되겠지.


일단 산부인과 예약부터가 난관이었다.  대학병원은 최소 2주를 기다려야 외래 진료가 가능했고 2차 병원인 여성병원도 산부인과 의사가 14명이나 있지만 예약이 꽉 차 있어 이번 주 내로는 진료가 힘들다고 했다. 뉴스에서 산부인과 병원이 적자라 폐업하는 곳이 많다더니 다 거짓말인가 싶었다. 일단 우리 동네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여성병원에서 문의해보니 외래 접수를 하고 기다리면 취소 환자가 나왔을 때 진료를 보게 해 준다는 확답을 듣게 되었고 무작정 가서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후, 아마도 이 병원에서 제일 막내인 것 같은 의사 선생님께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속옷을 벗고 나와 굴욕 의자에 다리를 걸치고 앉으라는 말에 한숨이 나왔지만 어쩌겠는가? 여기 앉아야 진료를 보는 것을! 이상한 기계로 요리저리 내 자궁 속을 보더니만 갑자기 배를 꾹꾹 눌러보는 의사 선생님.


왜 이제 오셨어요? 이렇게 큰 혹이 있는데 몸이 좀 이상하지 않으셨어요?


최근 피곤하지 않았냐, 살이 안 빠지더냐, 이걸 똥배로 생각하다니 이런 똥배가 어디 있느냐. 내게 폭풍 질문을 해 데는 의사 선생님을 보니 이게 꿈인지 실제인지 실감이 되지 않았다. 늘 만성피로에, 살은 안 빠졌고 똥배가 어떤 건지 내가 뭘 알겠냐고?


지금 이 순간 확실한 건, 큰일이 난 거라는 것.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일 CT 예약해줄 테니 당장 찍어보자는 말, 그리고 수술은 반드시 해야 할 거라고 당부하는 선생님. 막막하고 답답했다. 진짜 암이라도 걸린 건가.


병원을 나서며 친정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거지냐? 어디서 이따위 홍삼 씻은 물을 보내. 네 서방은 좋은 거 처 먹이고 네 어미 아비는 싼 거나 처먹으라고. 이거 너나 먹어 이 썩을 년아.


타이밍도 참 좋다.


병원에서 진료받고 나왔다는 내 얘기에 나보고 어쩌라고 너 아픈 걸 얘기하냐는 엄마. 차라리 내가 죽을병이면 엄마가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를 하려나 생각이 들었다. 근데 우리 엄마는 자신의 말을 후회하지 않을 분이다. 예전에 보험 수익자를 네 남편으로 하지 말라는, 너 죽으면 그 새끼 혼자 독차지하는 꼴 못 본다는. 자신보다 딸이 먼저 죽으면 보험금을 사위와 나누겠다는, 아마도 내가 죽으면 꽤나 대단한 유산 분쟁이 있을 것이다.


엄마의 저 억지스러운 얘기를 신경 쓸 수도 없이 나는 바삐 걸음을 옮겨야 했다. 오늘은 고1 시험대비 직전 보충이 잡혀 있어서 지금 당장 수업을 하러 가야 했다. 내 배에 있는 13cm의 혹 따위를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오로지 내일 시험만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웃으며 수업을 마쳤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남편과 얘기를 했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현실감이 없는 건지 그냥 덤덤했다. 만일 수술을 하게 된다면 언제 해야 아이들 수업에 차질이 적을지, 보험금은 얼마나 탈 수 있을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자궁암 일지 모를 상황. 그래, 내일 CT 찍어보면 확실히 알겠지. 일단은 내일을 위해 나는 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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