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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Nov 11. 2020

17. 꿀벅지 말고 손벅지!

손바닥보다 가느다란 내 허벅지 구경하실래요?

수술 후 이틀 지난 일요일 아침이 되니 오른쪽 다리를 못 움직여도 복근과 왼쪽 다리를 이용해 움직이는 요령이 생겼다. 물론 복근을 쓸 때마다 엄청 배가 당기기는 했지만 물을 먹거나 얼굴을 물티슈로 닦고 가글을 할 때도 몸을 일으켜야 했기에 잠시 배가 당기는 건 참아야 했다.


근데 움직일 때마다 환자복 바지가 헐렁헐렁한 것이 뭔가 이상했다.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운 왼쪽 바지를 걷어올려 종아리와 허벅지를 봤는데. 세상에 이건 최근 내 몸에서 발견 불가능했던 기아 난민의 다리였다. 손바닥을 펴서 허벅지와 비교해보니 손바닥보다도 수평 길이가 더 짧았다.


그래 날씬한 건 좋다.


근데 이건 날씬한 게 아니라 성냥개비 같이 비쩍 마른 몸이니 문제인 거다. 온갖 수술과 시술로 그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걷지도 못하니 근육이 다 빠져 이런 몰골이 된 것 같았다. 아, 밥을 먹어야겠다, 열심히 먹을 거야. 나 기운 내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아침에 나온 밥도 불고기를 빼고는 거의 다 먹었다.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는 평소에도 먹지 않는데 이게 반찬이라니, 배고파도 이건 거부!


와이파이도 안 되니 유튜브도 못 보고 움직이질 못해 운동도 못하고 결국 e-book이나 보며 시간을 때웠다. 심심해 죽을 것 같았다. 이제 살만해졌다 이거지. 그런데 세상에나! 일요일에 나를 수술해주신 비뇨기 의학과 선생님께서 회진을 보러 와 주신 거다. 병원은 마음에 안 든다만 진짜 이 선생님은 어쩜 볼수록 짱짱짱이었다.


선생님 왜 소변 색이 콜라색이에요? 살점은 왜 떨어져요? 찌리릿 아픈데 괜찮을까요?


질문이 밀린 학생이 선생님을 만났듯 진짜 열심히 질문을 했는데도 전혀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진짜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은인임이 분명했다. 전공의 파업으로 환자를 챙길 의사가 없어 주말에도 나와서 이렇게 회진을 돌고 계신다니, 선생님은 꼭  복 많이 받으시길 제가 간절히 모든 신에게 빌겠어요!


선생님께선 수술 후 이 정도의 피나 살점이 떨어지는 건 정상이라고 했다. 소변량도 좋고 밥은 잘 먹고 있냐고 물으셔서 입맛이 없다니


당연한 일이긴 해요. 가까운 시기에 수술을 두 번이나 했잖아요. 그래도 잘 드셔야 회복이 빨라요. 입맛 당기는 건 무조건 다 드세요. 뭐든 가리지 말고요.


진짜 만점짜리 대답이었다. 내 마음도 어루만져 주면서 잘 먹으라고 조언까지.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사르륵 녹는 듯했다.


저녁 식사도 열정적으로 열심히 먹어서 무려 반공기를 비웠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몸이 나을 테니 입맛 따위는 무시해주마! 근데 밥이 들어가니 꿀렁꿀렁 대변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간호사 선생님께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이 선생님, 충격 발언을 하시는 거다.


그냥 기저귀 채워드릴 테니까 거기다 일 보시면 돼요. 지금 해드릴까요?


이제 하다 하다 똥 기저귀까지 차라고?

아이고 진짜 별 경험을 다 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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