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났을 때 내 별명은 빨강머리 앤이었다. 머리 색이 붉으스름 한데다가 아이답지 않게 비쩍 마르고 못난 얼굴 때문이었다. 점차 자라면서 붉은 머리는 노르스름 해지고 얼굴에 생김새도 그나마 봐줄만하게 변해갔지만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 주변 어른들에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아야 했다.
툭 튀어나온 이마에 양 뺨에 리본 모양으로 나있는 주근깨, 가는다란 다리로 여기저기 참견하며 다니는 나를 보며 다들 천방지축에 못 말리는 아이라고들 했다. 특히 또래와 노는 것보다는 좀 더 나이가 있는 언니, 오빠들을 따라 다녔는데 그 덕분에 4살무렵에 는 한글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글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집에 있던 활자를 포함하고 있던 것들이 점차 망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매일 오는 신문에 아는 글자를 있으면 그 부분을 떼어내기위해 찢여버리기도 했고 고모가 읽으라고 사 주신 디즈니 동화책은 두꺼운 매직펜으로 온통 점령되어 있었다.
이런 정도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가슴이 철렁할만한 일도 서슴치 않았다. 개구리 왕자님이 나오는 동화책을 읽고 나서 집 주변에 있던 공원을 가게 됐는데 연잎 위에 앉은 개구리를 보고는 팔을 쭉 뻗으면 가제트 형사 팔처럼 늘어나 저 개구리 머리를 만질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직 7살도 되지 않은 꼬마 소녀가 말이다. 상상으로만 끝나지 않았던 나는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고 그 덕분에 내 하얀 원피스는 다른 색깔로 물들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도 왜 팔이 늘어나지 않았을까 고민했지 이 꼴을 보고 엄마에게 혼날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
요상한 아이임을 이미 알고 있던 우리 엄마는 크게 혼내기는커녕 이런 일이 언젠가는 생길 줄 알았다며 크게 웃으셨다. 그리고 제발 국민학생(우리 때는 이렇게 불렀다.)이 되면 상상을 다 실행해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실현되기 힘든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ㅎㅎ
국민학생이 되어서도 나의 특이함은 충분히 발휘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소풍 장기자랑에 나가 노래와 춤을 뽐내었고(물론 몸치라 완전 엉망이었다.) 반장선거에 나가 10명에 후보 중 유일하게 공약을 얘기하는 겁이 없는 아이였다. 어찌보면 이 겁 없음이 나의 어린 시절에 힘이었으리라... 예쁘고 착한 어린이는 아니었지만 늘 눈길이 가던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던 그런 아이였었다.
내년 40살을 바라보며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해보니 그 빨강 머리 앤은 어디에 갔을까 아쉽기만 하다. 당황스러울만큼 당당하고 한계를 모르는 상상력을 가졌던 꼬마가 사라진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 든다.
나의 빨강 머리 앤아. 덕분에 행복했어. 내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게 해주어 고마워.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