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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성훈 May 29. 2022

2022년 5월의 런던

살아있는 자와 살아남은 자들

여행으로 나서기는 시간적 여유도 부족하지만, 가족을 대동하기엔 경제적으로 엄두가 나지 않으니 밥벌이를 시작하고 가족이라는 것을 만든 후부터 일로만 찾는 유럽. 코로나19로 발 묶여있던 출장길이 다시 열리면서 런던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재택근무, 화상회의가 일상화된 시점에 무슨 구시대적인 출장인가', 그런 생각이 드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나 싶다. 어쨌든 가라는 출장이니 비행기에 몸을 맡기고, 우크라이나 전쟁 제재의 여파 때문인지 러시아 상공을 피한 비행경로 덕에 두 시간이나 더 걸려 14시간 만에 히드로 공항에 발을 들였다.


'그새 세상이 조금 더 바뀌었네.' 동행자가 출국장을 보며 한마디 한다. 출국 심사대는 전자여권 등록 입국 기기로 바뀌었다. 보수적인 유럽이라 아직도 스탬프를 찍을 줄 알았건만 (그다음 행선지였던 독일은 아직 도장을 찍어주고 있다), 여권 스캔과 카메라 안면 등록만으로 입국장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선 변화가 새삼스럽게 느껴다.


런던 교외에 있는 법인, 그리고 나무를 심어 경계만 갈라놓았을 뿐인 옆 건물의 호텔만 오가는 재미없는 출장의 월요일부터 금요일을 보내고, 일요일 독일로의 출국에 앞서 출장자끼리 런던 시내 매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거기엔 굳이 간 김에 두루두루 보겠다는 의미도 있다. 어쨌든 주말 아닌가.)


팬데믹의 세상에 갇혀 그간 빅벤이 보수 중이었는지도 몰랐지만, 그 장막을 얼마 전에 벗고 다시 위용을 드러냈다는 말에 발걸음을 옮겨다.


근접 촬영한 사진이 없어 아쉽다. 얼마나 찬란한지 전달하기 모자란다.


얼마나 되었을까? 런던을 종종 방문하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빅벤을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유럽의 고딕 성당들이 그러하듯 시커먼 세월의 때를 안고 있던 과거의 빅벤은 가고 금빛 찬란한 모습으로 환골탈태했다는 것. 세상을 호령하던 시대 대영제국의 자부심을 상징하고도 남았으리라. (아마 나도 19세기 영국 시민으로 살았더라면, 빅벤의 금빛 시계탑을 보며 제국의 일원임을 감사했을 것 같다.)


동양인이 없는 거만 빼면 모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더니... 빅벤부터 웨스트민스터 다리까지, 사람에 휩쓸려 걸어야 할 정도로 많은 인원에 놀라 우린 템강을 건너 한 블록 지난 램버스 다리로 향했다. (영국 국회의사당 맞은편 템스 강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국회 의사당 건너 좌우에 있는 다리 사이.)


이미 여름이 오는지 맑고 깨끗한 하늘과 다소 뜨거운 볕, 사람들의 활기. 야바위꾼과 구운 아몬드를 파는 호객꾼을 지나 강둑으로 내려오니 한적 나무 그늘 아래 온통 핑크색 하트로 도배된 벽이 끝없이 이어진다. 하트마다 써 내려간 글귀와 아마도 이름들... '아 여기는 또 다른 버전의 사랑의 자물쇠일까?' 일행과 그렇게 말을 나누 거닌다.



[The National Covid Memorial Wall]


'아...' 길게 늘어선 벽에 현판처럼 붙어있는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우린 모두 탄식하고 말았다.

그렇구나. 작은 하트 하나하나는 살아남은 자들이 떠난 자들을 그리워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벽을 보며 난 그만 지난 이 년 여의 시간이 빚어낸 비극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휴대폰 앱에 뜨는 실시간 감염자 집계 현황 같은, 숫자로 보이는 세계가 아닌 진짜 현실을 말이다.


우리는 조용히 길을 거닐었다. 말없이 흐르는 강을 오른편에 두고,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과 다녀간 시간이 좀 되었는지 말라버린 꽃다발이 띄엄띄엄 놓인 벽을 왼에 두면서 말이다. 그곳은 마치 이승과 저승이 경계 지어진 세상처럼, 살아남은 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을 갈라놓고 또 마주하고 있다.



피카딜리와 트라팔가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공연을 하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또 자신의 의견과 사상을 피력하는 사람들의 speech로 꽉 찬 활기를 되찾았다. 그곳은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生으로 가득 차 있다. 살아있는 자들의 도시 그 모습 그대로다.


그렇게 삶은, 그 광장에 선 사람들만 바었을 뿐 계속되고, 예전에 그랬듯 관광객과 나같이 잠시 짬을 낸 출장자의 방문을 환대할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로 채워진 도시는 다시금 살아있는 자들의 도시로 회복될 것이다. 메워진 상처는 웨스트민스터와 램버스 다리 사이만큼 흔적남긴 채 말이다.


그래서인지 살아남았다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조금 미안해진다. 그리고 또 그만큼 런던은 나에게 메시지를 남긴 도시가 되고 만다.


모두에게 평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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