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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성훈 Apr 02. 2022

길상사의 봄

봄의 매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굳이 기대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아보려는 이에게 종교 혹은 종교적인 장소가 불러일으키는 영감은 편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그곳을 향한 발걸음을 '근처에 맛있는 빵집이 있기 때문'이라 에둘러본다.


절이나 적인 장소에 들어서면 내 마음이 얼마나 건강한지 알 수 있다. 기와와 풍경, 바람이 만들어낸 나무소리가 그저 평안하다면 나름대로 옥죄어 괴롭히는 근심 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숨이 트일듯한 기분이 든다거나 백팔배라도 올리고 싶은 간절함이 인다면 혹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면 그건 어딘가 곪아가는 신호이다.


산사에 들어서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소멸한 것들이 똑같은 무게로 호불호 없이 공존해서 좋다. 성북동에 자리한 길상사는 산사라 하기엔 도심이고, 너무나 고급스러운 집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지만 넓은 경내와 꽃과 나무들, (계곡이라 하기엔 다소 멋쩍지만)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는 기운을 제공한다.


길상사가 이름을 얻은 건 단연 법정스님 때문이다. 경내 꼭대기에는 그분이 글을 쓰던 공간이 있다. 낮은 산등성이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지만, 전망대라 치기엔 절묘하게 높이가 낮아 도심의 건물들은 시야에서 비껴간다. 꼭 어린아이가 창문턱에서 세상을 보면 하늘만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곳 매화나무 두 그루가 하얀 꽃을 피웠다. 수 일 내에 피울 벚꽃에 비해 그리 좋은지 모르고 살다, 작고 하얀 꽃잎에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만다. 어쩜 저렇게 깨끗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하고. 몇 번이고 온 장소지만 오늘에서야 매화에 홀려 나무 아래 표식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보았을지 모르지만  오늘처럼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지 모른다.)


'법정스님을 모신 곳' (이렇게 쓰여있지는 않다. 뭔가 더 딱딱한 글귀였던 것 같다.)


이렇게 멋진 매화나무를 올려다보며 남쪽 하늘과 때때로 울리는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그분도 참 복 받으셨단 생각이 든다. 나처럼 한 번씩 찾아온 방문객이 쪽마루에 앉아 꽃이며 바람소리에 마음을 쉬는 모습을 보면 지긋이 웃으시지나 않으실지... 하지만 그건 속세에 갇힌 나의 생각이다. 입적을 하신 큰 스님의 영혼이 이곳저곳을 떠돌고 다니면 안 되니까.


매화나무서 바라본 풍경, 저 쪽마루에 앉으면 세상 마음이 편해진다


본당으로 돌아오는 그 풍광 좋은 짧은 계곡길을 내려오다, 초등학교 3학년 큰 아이 질문이 떠올랐다.

'아빠, 각도가 뭐예요?'

수학 수업을 듣던 아이는 각도가 뭔지 도통 모르겠단다. 나의 불성실한 설명이 마땅찮던 아내는 핀잔을 주며 이내 아이를 공부방으로 데려가 설명해준다.


아주 작은 각도라도 틀어지면, 그럼에도 그 길을 고집하다 보면, 원하던 방향에선 영영 틀어지고 말 것이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지만 아직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梅 一生寒 不賣香' (매화는 평생 추운 곳에 살아갈지언정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직장인이 뭐 그리 대단한 기개와 절개를 가질 일이 있겠느냐만, 소신 있게 살고자 마음속에 담아두던 문구인데, 매화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저 아름다운 봄의 전령에 너무 무거운 책무를 부여했나 보다. 꽃은 그저 꽃이어서 아름다운데 말이다.


틀어진 마음의 각도를 다시 돌려놓았는지, 틀어진 각도에 맞춰 살아가도 좋다 생각한지는 알 수 없지만 굳이 더 뒤돌아보지 않고 길상사를 나선다. 나의 마음은, 그 순간만은 편해진 것이 틀림없다.


매화가 좋아진다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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