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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성훈 Aug 15. 2021

1927년, 현해탄을 다시 건너다

다시 쓰는 '엄지 공주', '브런치 X 저작권위원회'

1927년 여름 어느 날, 혜선은 갑판 위로 올라섰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뱃머리에 부딪히는 하얀 거품의 파도가 밀어내는 진동에 거북함을 느낀다. 멀미와 가벼운 두통이 그녀를 괴롭힌다. 하지만 배의 진동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괴롭혀온 천식의 후유증인지는 모르겠다. 하얀 저고리를 잘 펴 입은 한 무리의 조선 여학생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진 않다.


저고리가 싫어서인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신문물을 선호하는 그녀의 부모가 서양식 옷을 입혀온 영향도 있겠지만, 땀으로 누렇게 변색된 저고리를 보는 건 즐거운 경험 아니다. 유학 전 다닌 학당의 여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핏대 높여 이야기하던 그녀의 선배들을 보면서도 혜선은 저고리 소매 끝에 묻은 잉크 자국에 자꾸 눈이 갔다. 옷감에 흡수되어 옅게 퍼져나간 색을 보고 있자면 각혈을 하며 쓰러진 어머니가 토해낸 검은 피가 생각나곤 했다.


“조선 분이신가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혜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한 번 더 말을 붙여볼까 잠시 망설이다 이내 포기하고 돌아서서는 열 걸음쯤 떨어 갑판의 서쪽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있는지 궁금했, 그의 시선도 가끔 느껴졌지만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신여성이라는 타이틀이 그녀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르주아라는 지적질이 거북다. 대다수 조선 여성들이 입은, 때 묻은 흰 저고리에 거북함을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일 수도 있다. 가끔은 자신이 조선인임을 부끄러워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르주아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기모노를 입고 조선인이 끄는 인력거에 올라타는 일본 여성을 보기라도 하면 조선의 옷은 영락없이 하층 계급의 상징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녀는 한 번도 자주독립이나 조선인의 각성을 부르짖은 적은 없지만, 그리고 스스로가 조선인임을 가끔 부끄러워한 적있지만 자신의 신분을 비관하거나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좀처럼 앞으로 나서는 법 없는 그녀를 향해 동료들은 그저 곱게 자란 아씨 같다며 ‘쁘띠 부르주아’라 칭했다. 물론 그들이 그런 그녀를 괴롭힌 건 아니다. 오히려 원만하게 지냈으며, 배운 이들 답게 일본어로 번역된 칸트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 혜선이 학업을 중단하고 조선으로 돌아 때에는 동경역까지 나와 눈물로 송별의 사를 읽어주기도 했다.


그녀가 현해탄을 건너는 배를 타고 귀국하는 이유는 어머니를 닮아 좋지 못한 폐가 다시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시는 경성으로 향하진 않을 것이다. 점잖은 신사라 칭찬이 자자하지만 아버지는 사실 지독한 열등감으로 그녀를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

잠든 머리맡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조용히 그렇게 내뱉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혜선의 아버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열등감을 평생토록 안고 살아가고 있다. 태어나 그녀에게 한 번도 조선의 옷을 입히지 않은 모던보이는, 예전의 조선이라면 손가락질당하며 살아갔을 것이란 걸 알았기에 (물론 그 당시도 그러했다) 조선의 때를 그녀에게 묻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번씩 속 깊숙한 곳에서 쳐 밀려 올라오는 열등감을 누르지 못하면 잠든 그녀 옆에서 그녀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지도 모를 말을 뱉곤 했다.


“너도 나처럼 더러운 피를 가졌어. 심지어 네 어미를 닮아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겠지.”

아버지의 푸념 어린 말은 잠든 척 눈을 감고 누워있던 어린 그녀에게 비수처럼 꽂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날은, 비가 세차게 내려 채 단단해지지 않은 어미의 봉분이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닐까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어른이 된 혜선은 당시 아버지가 뱉은 독설이, 그저 자신의 처지를, 일찍 떠나가버린 아내를 향한 서글픔이라 이해하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마냥 반갑고 따사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더군다나 천식이 다시 심해진 그녀로서는 아버지를 뵙는 게 불편하다.


심한 파도가 몰려왔는지, 갑판이 한 번 크게 출렁인다. 깜짝 놀란 이들은 난간을 부여잡는다. 가슴이 한번 철렁거릴 만큼 놀란 탓인지 거북했던 속 오히려 가라앉고 만다. 큰 출렁임에 배도 가던 방향을 조금은 틀어버린 듯하다.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가슴의 답답함이 올라오고, 매스꺼움금세 그녀를 괴롭히겠지만 지금순간  뚫린 듯이 모든 걸 털어버린, 평온 그 자체인 혜선이 된 기분이다. 그런 그녀는 다시 돌아 조선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본다.


갑판 한편에선 혜선에게 말을 건네었던 사내가 가슴팍에서 뭔가를 꺼내 소리쳤고, 어느샌가 조선 여학생들이 그의 옆에 무리 지어 부르짖는다.


이 광경을 보던 혜선은 8월, 조선의 매미소리를 닮은 그런 소란스러운 삶을 살아보아도 좋겠다고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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