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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곰 Jul 24. 2019

너의 마지막 장을 웃음으로 기록하다.

슬픔도 다 풀어내면, 비누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음을. 

돌아보면 당신은 내 곁에 있으면서도 또 늘 결핍으로 부재했다. 

당신은 한 번도 나에게 온전히 실재하지 않았다. 

(김진영, <이별의 푸가> p.114)




내가 아직 어렸던 시절, 드라마를 보면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던 장면이 하나 있다. 슬픈 상황을 만난 주인공들이 울면서 억지로 밥을 입 속으로 쑤셔 넣던 장면. 대부분 그들은 커다란 양푼이에 밥을 비벼서 울음과 함께 밥을 꾹꾹 눌러 담았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슬픈데 어떻게 밥이 넘어가냐고, 말도 안 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인가 첫 번째 직장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내게,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밥상을 차려주었다. 반찬은 몇 개 없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밥과 고향집 냄새가 묻어나는 된장찌개의 온기는 여전히 기억한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밥에게서 위로를 얻었다. 그 후 슬퍼도 나는 밥을 굶지 않았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나도 울면서 밥을 먹었다. 얼마 전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나는 물었다. 밥은 먹었냐고, 밥이라도 먹고 속상해하라고. 그렇게 나는 밥 심으로 산다는 어른들의 말을 몸으로 배워가고 있다. 주변 사람에게도 밥 심을 전파하고 산다. 





7월 내내 철학가 김진영의 글을 읽고 있다. <이별의 푸가>와 <아침의 피아노>를 번갈아 읽으며 나는 자꾸만 운다. 과거에는 너무 슬퍼서 울지도 못했던 일을, 이제는 굳이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울수록 내 슬픔도 옅어지는 기분이 든다.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해줘야지 결심했던 일인데 어느새 나는 그 친구의 얼굴도 희미해지고, 그날의 슬픔 역시 내가 느끼기에도 점점 작아진다는 기분이 든다. 마치 비누를 자꾸만 풀어내면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내 기억 속의 슬픔도 눈물로 녹아 사라지는 것 같다.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 그 친구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당시에는 내가 옆에 있어주었다 생각했으나, 지금 돌아보니 나는 그저 관객이었을 뿐 “친구 1” 등의 작은 배역조차 맡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관객이었던 것은 어쩌면 내가 자처한 일이었다. 사실은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은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땐 나도 나의 하루를 살아내기 버거웠다는 것을 핑계로 그 친구의 아픔을 그저 “알고 있다”정도로만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무거움으로 기억하고 아파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날,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식판을 들고 있던 장면을 기억한다.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는데도 마치 무엇인가에 막혀있는 것처럼 문 앞에서 주저하던 얼굴. 왜 나는 그때 고개를 돌렸을까. 왜 여기 와서 같이 먹자고 그 아이를 불러주지 않았던 걸까. 물론 그때 그 아이를 불렀다고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아이가 고개를 돌렸을지도 모르고, 내게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날 내가 손을 들었더라면, 그 아이를 불러주었더라면 지금도 그 아이는 어디에선가 선한 웃음을 짓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쉬이 떨쳐지지 않는다. 


물론 나도 어렸다. 나도 학생이었고, 나도 그 친구를 도와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 역시 수험생이라 선생님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정황이나 증거 없이 그 아이를 위해 싸울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그 아이의 기억이 아픔으로 남아있다. 이제야 또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제는 이 슬픔을 이렇게 풀어내다 다 닳아 없어지고 나면 난 그냥 괜찮아지게 되리라는 것을. 안타깝지만 원래 남의 슬픔이란 그런 법일 테니 말이다. 




마치 그것은 오래된 부채와도 같다. 어른들은 비열하다고 생각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어른이 되어버린 스스로, 그 당시의 나에게, 또 그 아이에게 어른으로서의 빚을 갚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 아이에게 진 마음의 빚이 얼마인지,  스스로에게 진 빚은 얼마인지 나조차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마음의 빚을 서서히 갚아왔다. 


만약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면 밥은 먹었냐고, 밥이라도 먹고 속상해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같이 떠먹으며 같이 울어주고 싶다. 커다란 양푼이에 서글픈 마음도 함께 슥슥 비벼 같이 눌러 담아주고 싶다. 어쩌면 그 아이는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몇 달 옆자리에 앉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어쩌면 그 아이 스스로가 털어버린 짧은 세월에 그저 지나가는 어느 한 지점이었을 뿐인데, 나는 참 오래도록 아파했고 참 오래도록 힘겨워했다. 


이제, 내 마음에 남은 부채를 털어내려 한다. 김진영, 그의 말처럼 그 아이는 한 번도 내게 온전히 실재한 적 없었으니 이제는 나조차 그 아이의 아픔을 잊어버려도 어쩌면 아쉬울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의 선한 웃음을 오래도록 기억해주고 싶다. 이제는 웃는 얼굴마저 희미하고 그저 배시시 웃던 입꼬리만 마음에 남았지만, 그 웃음의 미미한 흔적을 기억해주는 게 그 친구에게도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안녕. 그 날의 우리. 그 날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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