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행복의 새싹을 심는 일과 같다.
엄마 이거 보세요, 제가 너무 많이 눌러서 세모가 터졌어요.
이제 더는 삼각김밥이 아니네?
이제는 찌그러진 네모 같아졌어요. 웃기게 생겼어.
세모 아니라서 싸기 힘들겠다. 찹쌀이 김밥은 못난이 김밥이 되었네?
엄마는 나 사랑하니까, 우리 바꿔서 먹어요.
아이와 함께 하는 요리를 일주일에 두어 번은 하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아이가 전담하는 요리가 일주일에 두어 번이고 대부분 요리에 아이를 동참시키는 편이다. 요리라고 해봐야 아이도 나도 요리에 능숙하지 않기에, 친정엄마 눈에는 소꿉놀이 같은 음식뿐이지만, 그래도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할 기회를 준다. 내가 후딱 해버리는 편이 훨씬 간단하겠지만, 무엇인가를 해냈다고 뿌듯해하는 표정을 보면 부엌 청소를 하는 편이 더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우리 아이가 가장 먼저 시작한 '요리'는 절구로 깨를 빻는 일이었다. 똥 기저귀를 찬 놈이 깨를 빻는 나를 유심히 보더니 그럴듯하게 흉내를 내기에 쥐여준 것을 시작으로, 아이가 8살이 된 지금까지 절구질은 아이의 역할이 되었다. 마늘을 빻을 땐 냄새가 지독하다며 질색하긴 하지만, 마늘이 곱게 갈아질 때까지 도망은 가지 않는다. 자신이 마늘을 제대로 빻지 않으면 가족들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임무를 수행한다.
아이는 입을 앙다물고 마늘을 빻으며 '책임감'을 배운다. 삼각김밥을 만들면서 아이는 서둘러 대충 누르면 온전한 모양의 삼각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느긋함'을 배운다. 주먹밥을 만들 때는 다양한 채소들이 저마다 다른 색과 맛을 지니고 있음을 통해 '다양성'을 배운다. 만두를 빚으면서는 물칠을 너무 많이 해도 적게 해도 안 되는 것을 통해 '적당함'을 배운다. 그뿐인가. 칼질하면서는 '조심성'을, 익히는 시간에는 '인내'를 배우고, 가족들과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눠 먹는 '행복'을 배운다.
며칠 전에는 친정엄마, 아이와 취나물을 캐러 갔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봄이 수많은 생명을 움 틔워낸 덕분에 취나물뿐 아니라 처음 듣는 이름의 나물도 몇 종류 캤다. (원추리, 비름? 나물 등) 나도 아이도 태어나 처음 캐보는 것이라 끊어먹은 잎이 더 많기는 했지만, 우리가 캐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맛있어질 비빔밥을 하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랑 마주 앉아 수다를 떨며 다듬은 (정확히는 쥐가 갉아먹은 것처럼 만들어버린) 나물을 엄마가 뚝딱 무쳐주셨고, 삼대가 나란히 앉아 나물들을 보리밥 위에 얹고 된장을 두어 숟가락 넣고 쓱쓱 비볐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맛있게 한 그릇을 뚝딱한 아이가 자신의 배를 토닥이며 “아! 봄이 참 맛있다. 그렇죠?” 하며 웃는다. 아이의 표현에 나도 엄마도 깜짝 놀라 “찹쌀아 너 지금 뭐 먹었어?” 했더니 “비빔밥이요. 근데 할머니가 이건 봄에만 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봄맛이죠.” 한다. 맞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먹으면서도 당연하다 생각해왔는데 아이 덕분에 그것이 봄의 맛임을 깨달았다.
문득 생각해본다. 아이와 무엇인가를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새싹을 심는 일과 같다는 것을. 지금 우리 아이에게 행복의 씨앗을 많이 심어준다면 아이는 사는 내내 그 행복을 수확할 수 있겠지. 비어있는 자리에 스스로 행복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와 요리를 하는 것이 전혀 고되지 않다. 시간이 두 배가 걸려도 아이와 빨래를 개는 시간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