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쯤 많았던 H는 무능했다. 졸업 작품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주제와 장소를 정하는 일부터 촬영과 편집까지 도맡아 해 줬다. 나는 사전 답사를 갔을 때 어떤 구도가 괜찮을지 봐 주는 정도로만 도왔다. 딱히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어찌어찌 졸업한 H가 밥을 사겠다며 만나자고 연락했다. 누군가를 껴서 본 적은 있지만 둘이서는 처음이었다. 서대전네거리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돈카츠를 먹었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던 그는 곧 본론을 꺼냈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있는데, 마침 이 근처에 있으니 소개해 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듣자마자 다단계라는 걸 직감했다. 잠시 고민하다 알겠다고 했다. 밥을 사 줘서 그런 건 아니었고, 아무래도 호기심이 동한 게 컸다.
짧은 거리를 이동해서 이 층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면에는 개방된 넓은 공간이, 입구 오른쪽으로는 작은 방이,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보다 넓은 방이 있었다. 보는 순간 ‘다른 회사가 건물을 비우면서 두고 간 공간을 그대로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듯한 사무 집기 하나 없었으며 창고라고 소개하는 게 적절해 보였다. 모인 사람은 중년과 청년, 어린아이까지 더해서 이삼십 명쯤이었고 잠시 들른 듯한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기묘했다.
H는 조금 넓은 방으로 날 데려갔다. 가운데 통로를 비우고 양쪽으로 기다란 책상이 각각 다섯 개 이상 있었다. 책상 하나에 의자가 세 개씩 놓였으므로 서른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셈이다. H는 나를 맨 앞자리로 데려가서 안쪽에 앉히고 자신은 복도 쪽에 앉았다. 못 빠져나가게 막으려는 건가, 이런 부분까지 교육받나 싶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바로 앞에는 빔 프로젝터 스크린이, 오른쪽 구석에는 켜진 노트북을 올려놓은 강연 대가 있었다.
말끔히 차려입은 사십 대 남성이 들어와서 사실상 나를 위한 일대일 강의를 시작했다. 피피티를 띄워서 설명했고 난 듣는 시늉을 냈다.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 따위의 계급과 수익 구조가 어떻느니를 직접 들으니 흥미로웠다. 단 하나 또렷이 기억하는 내용이 있다. 어느 달에 십만 원어치를 팔면 그 수익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남은 한 해 동안 누적돼서 적용된다고 했다. 이를테면 일월에 십만 원어치를 팔고 이월에 이십만 원어치를 팔면, 이월에 얻는 수익은 이십만 원이 아니라 삼십만 원이 된다는 뜻이다. 들으면서도 이게 뭔 헛소리인가 싶었다. 오른쪽에 앉은 H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진심으로 감화된 모습이 멍청해 보이고 안타까웠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답답한데 잠깐 바람 좀 쐬자면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한껏 들떠 떠드는 H한테 이만 가 봐야겠다고 말했다. 왜 그러냐고, 널 위해서 시간을 내신 분인데 끝까지 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다시 올라가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그는 결국 “나는 너랑 같이 십억을 벌고 싶다.”라는 말을 꺼냈다. 십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난 잠을 별로 못 자서 피곤하다고 여러 차례 사양한 끝에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그가 위협이 되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기에 굳이 따라왔는지 모른다.
며칠인가 몇 주쯤 지나 H한테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워크숍을 가는데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단다. 참가비가 칠만 원인데, 내 몫까지 먼저 냈으며 부담스러우면 돈을 안 주고 따라오기만 해도 된다고 말했다. 난 간다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멋대로 신청했냐고, 안 갈 거라고, 다단계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고 정색했다. 그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적잖이 서운했는지 뒤늦게 이런저런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사이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동안 내가 잘해 줬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하다. 글 쓴다는 놈이 겪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해도 되는 거냐…. 어이없어서 몇 마디 하니 이번에는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실은 네가 글을 잘 쓰는 게 부럽고 질투가 났다고 털어놓았다.
연락이 끊겼기에 그러고 나서 H가 잘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홍길동몰’처럼 자신의 이름 뒤에 ‘몰’을 붙인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어서 운영했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서 들어가면 별의별 잡다한 물건들을 파는 껍데기뿐인 곳이었다. 뻔한 결과이지만 이마저 얼마 안 돼 없어졌다. 십억은 조금 그렇고 십만 원은 같이 벌 수 있는 정도의 사이였다. 벗어나야 한다고 설득할 만큼 가깝지는 않았다. 이제 와 떠올려 보면 찝찝함만 남는다. H가 걱정된다기보다는 내 반응이 어리고 미성숙했다는 점 때문에.
인스타그램: anda.hun
* 『사이 산문』은 격주로 연재됩니다.